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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나의 광장 중독‘증’ 발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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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2-12 09:41 조회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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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광장 중독‘증’ 발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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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 자 (금요 감이당 글쓰기 아카데미)

 

3. 출신이 아니라 행위가 고귀하게 한다.

붓다가 버린 ‘전륜성왕’을 부여잡고

북인도의 작은 왕국 카필라바스투에서 슈도다나 왕의 아들이 태어났다. 늦은 나이에 후계자를 얻은 왕의 기쁨은 하늘에 닿았는데, 바라문 사제들의 예언이 마음에 걸렸다. 싯다르타 왕자가 전륜성왕이 되거나 붓다가 될 운명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란 왕은 왕자의 출가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와 쾌락을 다 누리게 해 주었고, 아리따운 아쇼다라 공주와 혼인도 시키고, 후계자 한 명을 낳을 때까지만 미루자고 말렸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박차고 나갔다. 모든 걸 다 버리고, 전륜성왕의 길도 버리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들 라훌라마저 버리고, 아들이 태어난 바로 그날 출가했다.

어질고 현명한 왕이 되어 세상을 잘 다스리고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전륜성왕의 길도 멋지고 인생을 걸 만한 길이다. 물론 쉽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의 길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잠시 중생의 괴로움과 번뇌를 덜어 줄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을 대가로 해야만 가능하고, 심지어 그조차 영속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왕이란 끊임없는 전쟁과 정복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며, 그로 인해 고통과 괴로움을 계속 일으키게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길, 고통과 괴로움을 벗어나 완전한 자유, 평온에 이르는 길을 찾아 수행자가 되었다. 6년여의 고행과 수행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고, 그 가르침을 45년간 천하에 두루 펼쳤다. 인간의 몸으로 그 길을 열어 보이신 붓다의 출현이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인 것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고귀한 님인 것도 아니오.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서 고귀한 님도 되는 것이오.”(『숫타니파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20년, 전재성 역, 483쪽)

붓다는 당시 인도의 신분제로 인해 많은 괴로움이 생기고, 이렇게 정해진 운명을 넘지 못해 누군가에게 끝없이 의존해야 하는 중생의 고통에 깊이 연민했다. 이런 신분제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은 수행자들 사이에서도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와중에 붓다는 이렇게 선언하셨다. 사람의 천함과 고귀함은 출신에서가 아니라 행위에 의해, 어떤 삶을 살고 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강고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인간 해방’ 선언을 하신 것이다.

붓다가 전륜성왕의 길을 버린 이 역사적 사건은 왕의 아들이라는 출신, 정해진 운명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나는 행위를 직접 보여주신 것이었다. 아무리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어도 왕의 아들이 아니면 전륜성왕이 될 수 없었던 시대에, 누구나 출신이 아니라 행위로서 걸어갈 인간의 길이, 인간 해방의 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셨다.

내가 글도 못 쓰고 겉돌면서 끙끙 대자 튜터 샘이 한마디 던지셨다. “선생님은 왜 청년 붓다의 사자후에서 80년대 운동권 시절의 영광을 떠올렸나요? 그 시절을 되살리고 싶다는 욕망 아닌가요?”라고. 순간 나는 멈칫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 대목에서 열광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한 것은, 붓다가 당시 인도 사회에 던진 혁명적 메시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인류에게 새로운 길을 밝혀준 그 기쁨에 나도 동참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나도 모르는 내 속을 들킨 것 같아 몹시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난 붓다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가? 샘의 말씀대로 청년 붓다가 아니라 ‘사자후’라는 단어에 꽂혀서 온통 그걸로 이미지화하여 내 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붓다를 따르는 젊은 수행자들과 숲을 거니는 장면에서 80년대의 열기와 에너지를 느꼈고 그렇게 이미지화했다. 게다가 그런 식의 바꿔치기를 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설사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도, 두 모습은 완전히 다른 장면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붓다가 일으킨 그 사상의 물결은 인류 역사에 전혀 새로운 길을 열었고, 인간의 괴로움과 고통의 원인을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엄청난 가르침인데, 엉뚱하게도 나는 나의 욕망을 투사하여 축소하고 왜곡했다. 감히 부처님을!

내가 감이당에 올 때 먹었던 마음은 막연하지만, 공부해서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좋게 만드는 데 참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비전을 통해서. 그러다가 붓다와 불교를 알게 되었으니, 이전 생각들도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점검하고 바꿔 나가야 했었다. 그 과정을 건너뛰었으니 불교를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그런 과정이 없으니 급기야 붓다가 버리신 전륜성왕을 나 혼자 부활시켜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숫타니파타와 밀착하지 못하고, 겉돌았던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뒤덮인 자에게 어둠이 있다. 눈먼 자는 보지 못한다. 법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숫타니파타』, 불광출판사, 2023년, 이중표 역, 469쪽)   

나는 ‘붓다가 이 시대에 오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까?’와 같은 황당한 상상만 하곤 했다. 붓다의 가르침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고, 오로지 나의 세계에서만 나의 형상으로만 붓다를 붙들고 있었다. 그 무지한 상태조차 학기 말이 코앞에 닥쳐서야 알게 되었으니 그래도 다행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막막하긴 한데, 우선 붓다가 버린 전륜성왕부터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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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난 붓다에게서 무엇을 본 것인가? 샘의 말씀대로 청년 붓다가 아니라 ‘사자후’라는 단어에 꽂혀서 온통 그걸로 이미지화하여 내 식으로 받아들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붓다를 따르는 젊은 수행자들과 숲을 거니는 장면에서 80년대의 열기와 에너지를 느꼈고 그렇게 이미지화했다. 게다가 그런 식의 바꿔치기를 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설사 겉모습이 비슷하다고 해도, 두 모습은 완전히 다른 장면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괴로움의 원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

게다가 다음 이어진 튜터 샘의 말, “그렇게 살면 광장 중독에 빠져 헤매는 치매 노파가 될 거예요”라는 대목에 이르자 정말 쾅! 소리가 났다. 광장을 ‘헤매는 노파’라니, 나의 미래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렇게 80년대의 망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아무리 붓다의 가르침을 읽고 듣는다고 해도 미래가 너무 뻔하다는 말씀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환히 보이는 내 모습을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깜깜한 어둠을 헤매고 있었던 것은 바로 나였구나. 마치 내란범들이 세상 바뀐 줄도 모르고, 감옥에서 여전히 권좌의 꿈을 꾸는 것처럼 나도 미망을 헤매고 있었구나.      

오랫동안 활동가로 살면서 별별 것을 다 해 보았다. 1인 시위, 기자회견, 국회 앞 천막농성, 의원실 돌면서 호소하기, 토론회, 오체투지, 헌법 소원, 법 제정 청원, 고소나 고발, 인터뷰, 기사 투고, 서명운동, 홍보물 돌리기, 전국 순회투어, 한일 연대 등등. 이제 와서 돌아보니 온통 방해하고, 반대하고, 안된다고 외치는 것뿐이었다. 뭘 어떻게 하자거나 실제로 삶을 바꾸는 활동이란 게 거의 없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물론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바로 잡기 위한 활동도 필요한데, 문제는 그것만 하게 될 때 일어난다. 심각한 왜곡에 빠지거나,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진상 민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활동의 귀결은 결국 원인 제공자이기도 한 국가기관이나 국회에 의존하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도와 시스템, 소수의 권력자와 탐욕스러운 엘리트의 책임이라고 전제해놓고, 결론은 다시 제도와 시스템의 개선을 촉구하는 식의 악순환 고리를 쳇바퀴 돌 듯이 했다. 그러니 활동을 할수록 입지는 좁아지고, 대중들은 흩어지고, 관심도 멀어져 갔다. 법이나 제도란 없어서도 문제지만, 있다고 해도 안 지키면 그만인 불안정한 것들이다. 그마저도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매우 제한적인 틀인 데다 변덕스러운 정치인들의 선동에 따라 널뛰기를 하면서 국민을 애태우는 걸 늘상 보고 있지 않은가.

나는 점점 데모 기술자, ‘데모’ 전문가가 되어 더 자극적이고, 더 그럴듯한 기획에 몰입했다. 애초에 무엇을 하려 했는지도 잊게 되었고, 뉴스거리가 될 만한 소재를 찾다 보니 점점 소수가 되었다. 대중들은 무대 밖에서 동원되어 모였다가 흩어졌고, 기획자들은 다시 소수가 되는 식의 구조가 굳어졌다. 사람들과 함께 방법을 찾고, 연대하고, 더 넓은 공감대를 만들어 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는데, 우리는 늘 급했다. 뭐가 그리 급했을까? 실제로 급한 이유가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하여 고통을 덜기 위한 절박함에서 나온 게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자들의 시간표에 매달렸기 때문에 시간은 언제나 없었다. 그러니 처음 의도와 달리 집회와 시위는 종종 대정부 협상용이 되거나 특정 정치인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기획자 혹은 전문가들은 그 이력을 바탕으로 정계로 진출하거나 관직을 얻기도 했다. 

나는 이런 활동에 한계를 느꼈고, 그렇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 ‘광장’에서 뛰쳐나왔는데, 다시 붓다의 이름으로, 부처님 표 기획사를 꿈꾸며 돌아가려고 했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는 개인적 욕망이나 돈을 추구하지 않아 왔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정말 그들과 다를까?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는 편협한 사고에 갇혀 고집스럽게 버텨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을 못 견딘 것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광장이 주는 강렬한 쾌감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게 약물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장 중독 증세일 수 있겠다 싶었다.

나의 괴로움, 허무함은 지금의 나는 제대로 사는 게 아니라는 설정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는데, 지난 시절의 나는 그저 그 시공간 안에서 수많은 인연이 만들어 낸 사건들이었을 뿐인데, 그렇게 시절 인연에 따라 모이고 흩어졌던 것인데, 그래서 거기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데, 마치 뭔가 대단한 것이었다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움켜쥐고 있었다. 그걸 나 역시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는 식의 신분증명서처럼 놓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 여기의 나는 허상처럼 느끼곤 했다.

“비구들이여, 지금 여기에 있는 괴로움 덩어리는 감각적 욕망이 원인이며, 감각적 욕망이 인연이며, 감각적 욕망과 연관되어 있나니, 참으로 감각적 욕망이 그 원인이라오.”(『맛지마니까야』, 불광출판사, 2023년, 이중표 역, 101쪽)

정작 부처님이 지금 출현하신다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당장 꿈에서 깨어라!”. 이런 망상은 선지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의탁할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나약한 어리석음일 뿐이다. ‘네 안의 불성을 믿어라.’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제는 다시 새겨봐야 한다. 전도망상에서 깨어나 불교와 붓다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것이 나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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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스스로는 개인적 욕망이나 돈을 추구하지 않아 왔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정말 그들과 다를까? 어쩌면 더 위험할 수 있는 편협한 사고에 갇혀 고집스럽게 버텨온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요히 홀로 있는 시간을 못 견딘 것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광장이 주는 강렬한 쾌감을 잊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그게 약물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은 광장 중독 증세일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못 버린 ‘출신’, 운동권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8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그 당시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들이 꼭 좋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 한켠에 80년대 세대가 지금 권력의 한 구성 요소가 되어 버린 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 사회는 정말 신분제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는 신분제가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갈수록 계층 상승이 어려워지고 있으니 확실히 신분은 존재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정 학벌이나 스펙이라는 출신이 더 강력한 신분제 사회를 만들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꽤 오랫동안 권력의 상층부는 서울 법대와 육사 출신들이 장악했고, 지금도 그렇다. ‘출신’ 하나만으로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보증 수표를 얻게 되는데, 그게 한번 취득하면 평생 간다. 유효기간이 꽤 긴데, 때로는 자녀들에게까지 승계되기도 하니까 과거 신분제와 보증 기간의 차이만 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정계와 재계가 혼인으로 얽히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어서 돈과 권력의 이합집산은 다시 더 많은 권력과 부를 만들고, 계속 이렇게 두텁게 쌓여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이 카르텔에 특이한 출신들이 더해졌는데, 소위 ‘민주화 세대’라고 하는 80년대 운동권들이다. 군사독재를 지나 김대중 정부 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이들은 현재 권력층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처럼 한번 운동권은 뭐…. 그런 비슷한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여하튼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렇게 가성비가 좋은 학벌이니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이 달라진다니 이게 신분제가 아니고 달리 무엇이라 할 수 있나. 온 나라가 이토록 요건 쌓기에 전력투구하게 된 것도 그에 따른 권력과 재물 때문이다.

그럼 나는 어떤가? 나는 권력 끝자락에도 닿아 있지 않지만, 그런 특권 의식, 선민의식이 몸에 배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권력자가 아니니까 나는 다르고, 깨끗하다고 할 일이 못 된다. 오히려 이런 편리한 분별이 내 안에 잠재하고 있는 오랜 습관들을, 잘못된 욕망과 부조리함을 제대로 못 보게 가리는 어둠일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이분법적 사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왔다는 자부심, 그러니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제는 나 스스로 이런 허망한 ‘출신’에서 벗어나 ‘행위’로서, 행동으로서 고귀함을 추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붓다의 출가’, 이 역사적 사건은 출신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누구나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가르침이었다. 출신으로 정해진 왕의 길을 버리고, 평생 보장된 부귀와 권세를 다 벗어 던지고, 오로지 홀로 수행하는 길을 선택했고, 마침내 혼자 힘으로 고귀한 자가 되셨다. 이보다 더 상징적인 ‘행위’가 있을까? 당시로써는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노예나 여성이나 살인자에게도 인간의 길이 열렸고,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붓다는 누구든 ‘와서 보라’고, 자신 안의 불성을 믿고 정진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치셨다.

작년 여름, 나는 공동 주거생활 중에 기본적인 규칙(귀가 시간 준수)을 어기는 문제를 일으켰다. 구성원 중 두 사람이 사소한 일로 불편하게 되었는데, 그걸 쌓아 놓다가 점점 커져서 터져 버린 것이었다. 불편한 일이 생겼을 때 바로바로 내놓고 오해를 풀고, 이야기를 나눴으면 금세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고, 상황은 점점 꼬여갔다. 나는 그나마도 제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뒤늦게 어느 한쪽의 고민을 들어준다며 술잔을 기울이다 그만 귀가 시간을 넘겨 버렸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감이당의 기본 윤리는 물리적 장소뿐 아니라 몸과 마음, 감정에도 잉여를 남기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때그때 해결해야 남지도 않고, 쌓여서 복잡해지는 걸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윤리를 오고 가면서 읽기는 했지만 대충 흘려버린 나에게 그 뜻을 제대로 일깨워 준 사건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했지만, 실제 현장에서 세밀하게 적용하고 연습하지 않는 한 살아온 대로 습관이 튀어나왔고,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사소하게 시작된 문제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무게로 고통을 주었다. 이 문제로 여러 번 회의가 열렸지만, 각자의 편집된 기억은 진실 공방 양상이 되었고, 결국 절친이었던 두 사람은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흩어졌다. 5, 60대 여성들의 공동 주거생활은 그렇게 허탈하게 끝나 버렸다.      

이 와중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나는 집에서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넘어졌다. 팔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아팠지만, 사나흘을 침으로만 버텼다. 하지만 계속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해서 결국 엑스레이를 찍었고, 뼈가 바스러져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2주의 입원과 6주의 팔 고정, 4개월 재활 훈련이라는 스케줄이 따라붙었다. 한여름 무더위를 병원에서 시원하게 잘 보냈지만, 문제는 재활이었다. 담당 의사는 넉 달 정도면 일상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정작 회복되기까지는 1년이 넘게 걸렸다. 단 6주간 묶여 있었는데도, 팔과 어깨는 아주 무력해져서 갓난아기처럼 하나하나 훈련해야 했다. 밥숟가락을 들기까지 한 달, 머리를 빗기까지 넉 달, 자유롭게 팔을 돌리기까지는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다.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멈췄던 기간만큼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도 매우 열심히 훈련하고 반복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다친 몸이야 불편함을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으니 훈련과 연습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습관이나 생각, 마음은 그렇지 않다.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설사 알아차린다 해도 습관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죽하면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것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머리와 몸이 받아들이는 속도와 내용이 다르고, 때로는 머리가 몸을 속이기도 한다는 걸 재활 훈련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떤 습관들은 자동 반사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니 스스로는 절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누군가 말을 해 주어야 겨우 관찰을 하게 된다. 도반이 그래서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다. 나는 나 자신을 가장 모른다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거친 마음으로 공동 주거생활을 했으니, 사람들을 얼마나 불편하게 했을지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다. ‘나는 이랬던 사람이야, 난 갈 길이 바쁘니까 그대들이 이해해 줘야지’와 같은 얼토당토않은 생각들로 꽉 차서 주변을 돌아볼 마음을 내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큰 문제가 없으면 되는 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예를 들어 매주 정해진 대청소 시간에도 내 일정이 생기면 빠지곤 했다. ‘구역을 남겨 놓으면 다녀와서 해 놓을 테니 이해를 바란다’라는 식으로 대했으니 사람들이 참 힘들었겠다. 공동체는 내 기준으로 나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서, 거의 1년 가까이 함께 한 이들과 삶을 나누지 못했다.

한때는 목적의식적으로 사는 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냥 세태에 휩쓸리고 돈을 좇아서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20대에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서 나도, 세상도, 사람들의 욕망도 많이 달라졌다. 이렇게 달라졌는데, 내 마음과 생각만 그대로라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시대착오적이며 어리석은 일인가.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역설적이게도 배가 고프거나 추위에 노출될 때 가장 활성화된다고 한다. 나에게 배움의 장이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은 지난 시간들을 실체화시켜 여전히 내 속에 꽉꽉 채워 놨기 때문일 것이다. 내 안에 가득한 편향된 인식을 덜어내지 않으면, 그걸 알아채지 않으면 식탐에 걸린 사람처럼 먹어 대기만 하다가 탈이 나고 말 것이다. 지난 공부의 과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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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가 아니니까 나는 다르고, 깨끗하다고 할 일이 못 된다. 오히려 이런 편리한 분별이 내 안에 잠재하고 있는 오랜 습관들을, 잘못된 욕망과 부조리함을 제대로 못 보게 가리는 어둠일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이분법적 사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왔다는 자부심, 그러니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이제는 나 스스로 이런 허망한 ‘출신’에서 벗어나 ‘행위’로서, 행동으로서 고귀함을 추구해야 할 때가 되었다.

 

4. 신기루 같았던 4월 4일, 광화문 광장

4월 4일 늦은 오후의 광화문 광장. 그날 오전 11시 22분은 역사에 기록될 시각이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라는 문형배 재판관의 목소리가 만방에 울려 퍼졌다. 온 나라가 환호했다. 나는 금요대중지성 수업에 참여 중이었고,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았다. 오후 늦게라도 잔치 마당이 열릴 것을 기대하며 청소를 마치고 광화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럴 수가. 어스름이 막 깔리는 광장은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몇 달간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인파와 환호성, 깃발과 천막과 피켓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말 남김없이 사라져버렸다. 선고가 내려진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는 일상으로 채워졌다. 그때의 충격이란, ‘모든 것이 무상하다’라는 부처님의 말씀으로도 부족한 강렬한 무엇, 황당함, 허탈감이랄까?

들뜨고 분주한 이 세상의 속성, 고(苦)의 근저에 이것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자아는 잡다한 구성 요소가 모인 무더기일 뿐이요, 세계는 신기루처럼 공허한 것이다.” (웨라삐띠야 지음, 『참된 길동무』, 고요한 소리, 2001년, 31쪽)

그 순간 나는 왜 한국의 신속한 모드 전환에 감탄하는 대신, 충격과 허탈감을 느꼈을까?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설레어 하며 광장을 향했을까? 그날의 ‘광장’에서 나는 또 80년대를 보고 싶어 한 게 틀림없다. 그게 나의 자아이고, 내가 사는 이유이고, 그러니 거기에서 숨통이 좀 트이고 싶다고 갈망했다. 그런데 그런 건 있을 리 만무했으니, 당연히 텅 빈 광장만이 내 앞에 펼쳐졌을 뿐이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몇 달간의 흔적은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들어갔고, 어디선가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갑자기 튜터 샘의 ‘광장에 중독된 치매 노파’ 이야기에 더해 두 장면이 겹쳐졌다. 하나는 서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00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할아버지로 남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매우 신심 깊은 행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다른 장면은 수년 전 도쿄 앞 경제산업성(일본 정부 부처) 근처에 있는 천막을 방문했을 때 만난 90대 할머니 모습이다. 이 노파는 거동이 불편한지라 천막 앞 작은 의자에 앉아서 종일 행인들에게 프로파간다(선전 활동)를 하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들었다. ‘일본은 핵발전 하면 안 된다. 전쟁도, 핵도 반대한다.’ 한창 한일 연대 활동의 하나로 서로의 나라를 방문하여 활동 상황을 공유하고, 현장도 함께 다니며 교류하던 때였다. 일본도 고령화가 꽤 빠른 속도로 진척되어 시위 현장은 60대 이상의 노년층들로 채워졌는데, 그래도 90대 고령의 할머니라서 좀 놀랐다. 그 장면이 강렬하기도 했고 감동적이기도 했다. 역시 행인이 듣는가와 무관하게 소리는 작지만, 신념에 찬 할머니의 선전은 계속되었다. 그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나도 힘이 다할 때까지 활동하며 살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불신지옥 할아버지와 일본 반핵 할머니, 그리고 광장 중독자 노파인 나의 미래까지 한꺼번에 떠오르는데 이게 뭘까? 아무리 내용의 차이를 주장한다 해도 현상은 같다. 상황과 조건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념이나 신앙심만이 중요하고, 그래서 공감을 얻기 위한 노력을 하기보다는 고집스럽게 꺼내놓고 동참을 강요하기만 한다는 점이 공통점이랄까. 같은 현상이라도 어떤 마음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나 자신도 놀라고 있다.

‘광장 중독증’은 이제 막 발견한 내 오래된 습성이다. 30여 년의 활동으로 굳어진 몸과 마음과 생각을 낱낱이 파헤쳐서 관찰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업이라 할 수 있다. 언제든 주의집중 하지 않으면 나타나서 어딘가로 나를 끌고 다닐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에 무관심하고 관계들과 단절하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사에 늘 깨어 있고, 관심을 두되 거기에 휘말려 평정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 붓다가 말씀하신 중도의 길일 것이다.

붓다는 도시와 숲 사이에서 유행하셨다. 탁발을 나가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찾아오는 이들의 질문에 답하시는 삶, 그것은 철저하게 당대의 세속적 삶과 욕망과 사람들에게 깊이 공감하고 연민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생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에 중생의 근기에 맞게 가르침을 펼 수 있었다고 한다.

내가 광장으로 달려가서 느끼고 싶었던 환희와 공감과 일체감을 이제는 달라진 조건에서 다르게 사는 현장에서, 지금 여기에서 만들고 느껴야 한다. 이전의 삶이 일상을 옥죄는 외부와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다양한 개인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무지와 욕망을 직시하고, 맞서는 싸움으로 달라져야 한다. 나의 안으로 들어가 직면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워 익힐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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