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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다윈을 만나다] ‘과포자’가 『종의 기원』을 읽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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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9-30 09:59 조회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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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포자’가 『종의 기원』을 읽게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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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보 라

 

잊고 있던 본능을 찾아서

연구실에 오기 전까지 나는 소위 ‘과포자’였다. 과학은 과학자가 될 특별한 사람들이나 하는 공부라고 생각했다. 과학자가 될 것도 아닌데, 과학 좀 몰라도 먹고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과학, 그리고 과학과 세트인 수학을 피해 문과를 택했고,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다시는 과학과 만날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분명 그랬는데, 과학과 다시 만났다. 연구실 청년 프로그램의 커리에 과학책 하나가 떡 하니 끼워져 있었던 거다. 몇 주에 걸쳐 세미나를 했고, 연구실 과학 선생님인 근영 샘의 특강도 들었다. 분야가 과학이다 보니 친구들 모두 발제를 부담스러워했는데, 나는 순전히 도전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발제를 맡았다. 그런데 세상에, 너무 재미있었다. 철학책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내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다르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때 공부한 책 제목처럼 나는 ‘떨림과 울림’을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더 궁금해졌다. 그 궁금한 마음이 과학을 못한다는, 과학은 어렵다는 마음을 이겼다.

그렇게 과학에 마음을 활짝 열게 됐다. 느닷없이, 놀랄 만큼 아주 쉽게. 과포자였던 내가, 이제는 과학책을 주저 없이 펼쳐들게 된 거다. 물론 어려웠다. 그래도 괜찮았다. 새롭게 이해하게 된 한 줄이 주는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러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낌의 진화』라는 책을 만났다. 이 책은 감정, 느낌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신경과학의 관점에서 설명하는 책이다. 그때까지 나는 느낌이나 감정을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동거자로 여겨왔다. 나의 의지를 거슬러 요동치는 감정은 그야말로 인생의 방해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낌의 진화』를 읽고 나는 감정을 이해하게 됐다. 감정을 바라보는 시선이, 감정과 맺는 관계가 달라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왜 과학이 재미있는지, 왜 그렇게 떨렸는지. 그동안 나는 과학을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과학이 밝혀낸 사실들은 첨단 기술에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이지 나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왔다. 나와 과학 사이에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발달한 기술로 인해 일상이 좀 더 편안해지는 것 정도라고 생각했다. 과학책을 읽는다고 내 삶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거다. 그저 특정 분야의 지식이 많아지는 것일 뿐.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과학 러버, 나탈리 앤지어는 말한다. ‘“과학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이 아니다. 과학은 마음의 상태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며 본질을 드러내지 않는 실체를 마주하는 방법”(나탈리 앤지어, 『원더풀 사이언스』, 지호, 38쪽)이다라고. 그렇다. 과학을 배운다는 건 사실이나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방법과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어떤 태도인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김상욱, 『떨림과 울림』, 동아시아, 270쪽)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미 과학을 하고 있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실험실이 없어도 과학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인류의 많은 스승이, 아니 모든 인간이 이미 과학자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실험하고, 직접 경험해보고, 나의 전제를 의심하며, 이 세계의 실상에 가까워지는 것, 그리고 이를 소통 가능한 보편적인 언어로 나누는 것이 곧 과학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처님은 마음을 다루는 과학자셨다. 우리가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원시 인류의 야생적 사고도 관찰과 경험에 기반한 ‘구체의 과학’이었다. 수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이 호스의 문제인지, 수전의 문제인지, 펌프의 문제인지 하나씩 바꿔보며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실험과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일상은 과학으로 가득 차 있다. 관찰하고, 실험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며 나와 세상을 알아간다. 기껏 배우고 익힌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의 작은 세상이 무너지고 뒤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왜?’라는 질문이 폭발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왜 해가 뜨면 달이 지는지, 사람은 왜 죽는지, 내가 보는 세상과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이 정말 똑같을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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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알아야 하는 이유가 필요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계의 문제일 수는 없을까? 우리의 신경계가 과학에 꼭 맞는 구조를 하고 있는 만큼, 사람이라면 마땅히 과학을 알아야 한다. 과학은 학문의 한 영역, 사고의 한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는, 예를 들자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역사 같은 어느 한 영역에 국한된 단순한 어떤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인류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거대하고 광대한 바다이며, 인류가 행성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가장 깊은 뇌의 주름을 가지게 되면서 나타난 결과물이자 그 목적이다. (…) 사고를 풍부하게 하는 것도, 표면 밑에 숨겨져 있는 것을 보는 것도 모두 과학의 재미다. 왜 그렇게 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은 기분을 좋게 한다.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당신은 과학을 알아야 한다. (나탈리 앤지어, 『원더풀 사이언스』, 지호, 26~27쪽)

 

나탈리 앤지어는 말한다. 우리의 신경계가 과학에 꼭 맞는 구조를 하고 있다고. 모든 사람이 누가 가르쳐주거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자라나는 것부터,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원리를 알게 됐을 때 개운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나, 동전만 하게 보이는 태양이 사실 지구 크기의 109배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다. 연구실에서도 과학 강의가 자주 열리는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 재미있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우리의 본능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과학을 해야 한다! 학교 졸업과 동시에 이별했던 과학과 다시 만났을 때 떨리고 기뻤던 건, 잊고 있던 본능을 되찾았기 때문이 아닐까.

 

『종의 기원』에 대한 오만과 편견

본능을 되찾은^^ 나는 어느새 연구실에서 열리는 과학 수업에 빠지지 않고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다 만난 게 『종의 기원』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종의 기원』을 별로 읽고 싶지 않았다. 『종의 기원』을 실물로 본 적이 있으신지? 꽤 두껍다. 내가 가지고 있는 번역본으로는 650페이지 정도 된다. 창조론이 틀렸고, 진화론이 맞다는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두꺼운 책을 읽어가며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종의 기원』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도 한몫을 했다. 다윈, 그리고 『종의 기원』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바로 ‘생존투쟁’,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와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다. 20세기로 접어드는 시기,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며 인류 사유에 혁명을 일으킨 인물로 꼽히는 다윈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우생학, 나치즘, 인종차별, 자본주의 하의 경쟁과 착취 등에 정당화할 빌미를 준 어둡고 비관적인 생물학자로 여겨질 뿐이었다. 다윈 이후, 다윈을 비판하며 공생설을 주장했던 생물학자들의 책을 먼저 읽었던 탓도 컸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고 나서는 내가 그동안 다윈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테면 『종의 기원』에는 분명 ‘생존투쟁’이라는 말이 나온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다윈이 말한 ‘생존투쟁’은 살아남기 위해 생명체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싸움과 경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생존투쟁’으로 번역된 이 말은 영어로 ‘struggle for existence’다. ‘struggle’은 분투한다, 애쓴다는 뜻이다. 즉 모든 생명이 생존을 위해 애쓰고 분투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 생존투쟁이다. 그래서 다윈은 자신이 생존투쟁이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그리고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찰스 다윈, 『종의 기원』,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120쪽)음을 강조한다. 자신의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랐고, 사례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최대한 전달하고자 했다. 다윈이 말한 생존투쟁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는 뜻도 포함되며, 개체의 생존뿐만 아니라 자손을 남기는 성공 또한 포함”(같은 책, 120쪽)하는 것이다. 즉 서로를 돕는 것, 의존, 기생 등 생명이 시도하는 모든 분투가 곧 생존투쟁이다. 물론 여기에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싸움도 포함된다.

이렇게 대놓고(?) 친절하게 설명해두었음에도, 1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째서 다윈의 이야기는 오해를 받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자연을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어느 부분을 확대하고, 어느 부분은 지워 버린다. 그래서 “반짝이는 자연의 얼굴을 기쁘게 보”거나, 자연의 이름으로 잔인한 폭력이나 차별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자연을 아름답고 평화로운 것으로 그리는 것은 물론이고, 약육강식의 디스토피아로 그리는 것 역시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다윈의 개념들도 마찬가지다. 다윈이 하고자 하는 말과 상관없이, 다윈의 개념들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필요한 곳에 동원되었다. 우생학으로, 인종차별로, 동물학대로. 다윈이 우려했던 대로 말이다(어쩌면 그냥 끝까지 읽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다윈이 본 자연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니었다. 모든 생명은 숨쉬고, 먹고, 번식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활동은 결코 독립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였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모든 생명체에 멀고 가깝게 기대어 살아가며, 다른 존재들 덕분에 살고 다른 존재 때문에 죽는다. 다윈이 자연에서 본 것은 이 긴밀한 연결망이다. 모든 생명의 조건은 관계 속에서 복잡다단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은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나의 삶이 다른 생명의 죽음에 의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있을 때에는 식물도 생명인데, 하는 생각에 과일만 먹고 지낸 적도 있다. 내가 살아 숨 쉬는 게 어쩐지 죄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여러 이유와 사정으로, 무엇보다 ‘그럼 내가 죽는 게 답인가?’ 하는 생각에 막혀버려서 그 문제를 덮어둔 채 지내게 됐다. 그런데 생존투쟁을 읽으면서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조건을 깊이 이해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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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본 자연은 유토피아도 디스토피아도 아니었다. 모든 생명은 숨쉬고, 먹고, 번식하기 위해 애쓴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활동은 결코 독립적으로 이뤄질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였다. 모든 생명체는 다른 모든 생명체에 멀고 가깝게 기대어 살아가며, 다른 존재들 덕분에 살고 다른 존재 때문에 죽는다. 다윈이 자연에서 본 것은 이 긴밀한 연결망이다

 

이렇게 『종의 기원』과의 첫 만남을 통해 다윈에 대한 편견이 깨졌다. 그리고 그 다음 해, 글쓰기 수업에서 『종의 기원』을 다시 읽게 됐다. 이번에는 내가 오만했음을 깨달았다. 나는 창조론 시대의 사람들이 신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믿은 건 그때가 지금보다 미개한 시절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해 공부해보니 당시 사람들이 우리보다 합리적이지 못해서 창조론을 믿은 게 아니었다. 당시에는 진화론이야 말로 논리와 근거에 구멍이 송송 나 있는 상상의 산물이었다(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하겠다). 다윈 시대의 사람들도 합리적인 방식으로 창조론을 믿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놀랐던 건 내가 생명과 세상을 보는 방식이 창조론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생명체가 갑자기 뿅-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창조됐다는 말은 더더욱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창조론자들과 동일한 전제를 가지고, 비슷한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윈은 자신의 시대에도, 160여년이 지나 진화론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나는 이러한 사실이 다윈이 싸우고자 했던 우리의 사유패턴이 얼마나 뿌리 깊고 견고한 것인지를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함께 『종의 기원』을 공부하던 한 학인분이 원숭이가 조상인 것 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는데, 쥐나 바퀴벌레가 나의 조상이라고 하는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왜 원숭이는 되고 쥐는 안 되지? 쥐를 싫어하시나?’하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계속 공부하다보니 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실 진화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생각해보자. 부모와 자식은 닮았다. 물론 차이는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다(그리고 아주 이상하게도 동생은 부모님보다는 외삼촌을 닮았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걸음걸이도, 잠자는 자세도, 성격도 똑같다고 했다(그래서 어머니가 별 이유 없이 유난히 나에게 까칠해지시면 아버지랑 무슨 일이 있는가보다 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나는 다른 점도 많다. 그렇다고 인간의 자식인 내가 원숭이나 해달로 태어나진 않는다. 내가 자식을 낳는다 해도, 나와 닮고도 다른 인간(?)을 낳을 거다. 나 또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낳진 않을 것이란 말이다. 내 자식이 자식을 낳아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다른 종이 생겨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이는 창조론자들이 제기했던 의문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의문 앞에서 창조론자들은 이 다양한 생명이 존재하는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신이라는 존재를 떠올렸던 것이다.

앞서 과학은 사실의 집합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자 태도라고 말했다. 창조론자들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아도, 무신론자라 해도 ‘변하지 않는 본질’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창조론자의 눈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변치 않는 본질이 있다는 생각은 내 생각과 말 속에서 일상적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저 사람은 원래 저래’라고 누군가를 뼛속까지 악한 존재로 규정하거나(반대로 무조건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보거나), 나의 2-30대를 스스로 ‘청춘답지 못하다’고 여기며 비루하고 별 볼일 없는 것으로 만들 때, 훌륭한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타고나기를 다르게 타고 났기 때문에(상대는 천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한들 나는 그들처럼 될 수 없을 거라며 좌절할 때 나는 창조론자와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조상이 원숭이고, 더 거슬러 가면 아메바래!’라는 ‘사실’이 아니다. 생명을, 이 세상을 무수하고 복잡한 연결 속에서 보는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이 세계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생명들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관계 밖에 혹은 관계에 앞서 존재하는 그 어떤 초월적인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한때 나의 어머니였다고 말한다. 나는 진화론을 공부하면서, 이 말이 결코 비유가 아님을 알았다. 내 세포 하나하나에는 모든 생명의 최초 어머니였던 생명체의 유전자가, 아주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해온 역사가 담겨있다. 나는 각각의 생명체들이, 그들의 기관이 그렇게 존재하게 된 역사를 이해하게 됐을 때, 유기체들이 복잡한 관계 맺으며 서로가 서로의 삶에 깊숙이 맞물려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 신기하고, 경이롭고, 감탄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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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히 ‘우리 조상이 원숭이고, 더 거슬러 가면 아메바래!’라는 ‘사실’이 아니다. 생명을, 이 세상을 무수하고 복잡한 연결 속에서 보는 태도를 익히는 것이다

 

 

잃어버린 생명력을 찾아서

우리는 모두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초월적인 존재도, 변하지 않는 본질도,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목적도, 그 어떤 특권도 없다. 그저 관계 속에서 무언가가 되어가며 끊임없이 변해갈 뿐이다. 『종의 기원』을 읽고 이것을 이해했을 때 나는 해방감 같은 걸 느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게 없구나! 너무 홀가분했다. 돌아보면 늘 되어야하는 무언가를 내 구체적인 삶 앞에 두고 살았던 것 같다. 물론 그건 계속 바뀌었다. 그래서 내가 되어야할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것 같다. 물론 삶의 의미나 방향, 비전을 가지고 사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와 단절된 방식으로 의미나 목적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내가 되어야 하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갈 때, 그 방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관계들이나 예측 불가능한 사건들은 모두 방해꾼처럼 느껴졌다. 그럼 쉽게 고립의 지름길로 자발적으로 가게 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생각은 나 스스로를 괴롭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를, 내가 맺고 있는 관계를 무시한 채 무언가 되어야 한다고, 또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이건 자신을 슈퍼맨이나 신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사유방식이 너무나 뿌리 깊게 내 안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 글을 쓰면서도 어디선가 영감이 번개같이 찾아와주기를 바랐고, 글 잘 쓰는 사람들과 비교하며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좌절했다. 그렇지만 다윈 덕분에 이제는 이런 마음이 기적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금방 알아차리게 됐다. ‘누군가가 몇 십 년을 갈고 닦아 이뤄낸 것을 몇 년 만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너무 오만한 거 아니니? 나는 『종의 기원』을 22년 만에 발표했다고!’라고 말하는 다윈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 다시 책을 읽어보자. 내가 이번에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데에서 머물러 보자. 그러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어떻게 또 한 문장이 써졌다. 무엇보다 마음 한 구석(?)에서 피어오르는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윈과 다윈이 보여준 무수한 생명들 덕분이다.

『종의 기원』은 생명에 대한 이야기다.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생명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하게 하는 책이다. 어떻게 다윈은 생명의 보는 관점을 바꾸게 만들었을까? 다윈의 눈으로 생명을 바라볼 때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생명’이라고 하니 왠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나의 하루하루의 일상과 닿아있는 이야기이자,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이야기라는 걸 말해두고 싶다. 우리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는 비둘기와 겨우살이와 개미들도 함께할 거다. 생각보다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을 거라고도 말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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