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노예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립할 수 있을까. 어떻게 독립하고, 해방될 수 있을까. 간디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자립이라 말하고, 그럴 때 해방은 이뤄진다고 한다. 간디의 자립을 기준으로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나를 다스린다는 마음이 중심에 없을뿐더러 나 자신을 다스리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구조가 크게 바뀌고, 한 방에 바뀌는 게 해방이라 생각했다. 천천히, 조금씩 자기 삶을 바꿔가는 일보단 화려하고 멋진 걸 ‘내가’ 하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자기 삶을 조금씩 바꾼다고 해서 누가 알아주겠는가. 진짜 사람들이 해방되길 원하는 걸까. 그 마음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에게 박수 쳐줄 사람이 필요하고, 박수받는 삶을 살고 싶은 건 아닐까.
누구보다 잘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노예적 태도와도 연결된다. 나는 어떨 때 밖을 향해 기준을 세울까. 매 순간 기준이 밖을 향해 있지 않고, 매순간 노예의 상태로 살진 않는다. 강하게 작동할 때가 있는데, 내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을 때 주저앉았다. 그럴 땐 간디의 말처럼 “우리의 예속된 상황을 인도 전체의 탓으로 간주”(간디, 『힌두 스와라지』, 지식을 만드는 지식, 82쪽) 해버렸다. 한 걸음 나아가지 못하고 밖을 탓했다. 그게 쉽고, 편하기도 했다.
쓰다 보니 정말 내가 욕망의 노예같이 느껴진다. 결국,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삼라만상을 우리의 하찮은 척도로 측정하기에”(간디, 『힌두 스와라지』, 지식을 만드는 지식, 82쪽) 내가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사람이 되면, 욕망에 휘둘리지 않게 되면, 그때 간디의 말처럼 세상은 해방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