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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강감찬 청년캠프] 꼼장어의 고통에서 삶의 기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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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3-23 11:44 조회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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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기 윤 (2024 강감찬 청년캠프)

 

꼼장어를 먹을 수 없게 되다

나는 세상의 고통에 무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고통을 외면했다. 나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슬픔과 고통의 현장들이 나와는 상관없는 거라 여기며 살아왔다. 세상을 외면하며 나의 안위를 지키는 것, 이것이 내가 살아온 방법이다.

깨봉에서 공부를 하며, 불교를 배우기 시작하며, 이런 내게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아버님 생신 때마다 꼼장어를 먹는다. 꼼장어는 아버님의 최애 음식 중 하나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꼼장어를 잘 먹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꼼장어를 먹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잔인한 꼼장어 조리방법 때문이다.

꼼장어는 껍질이 벗겨진 채 몸을 꿈틀거리며 살아 있었다. 껍질이 벗겨진 꼼장어는 숯불에 달궈진 석쇠 위에 올려진다. 종업원은 숯불의 열기에 몸부림치는 꼼장어가 떨어지지 않게 스테인리스 볼로 덮는다. 스테인리스 볼과 안에서 요동치는 꼼장어가 부딪쳐 탕 탕 하는 소리를 낸다. 시간이 지난 후 볼을 열고 꼼장어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이 장면을 두 눈으로 보고 나니 나는 도저히 꼼장어를 먹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해서 먹어야하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타자, 그러니까 꼼장어의 고통은 내게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 바로 이 지점이 내가 그동안 세상의 고통을 외면해 온 이유와 마주칠 것이다. 세상의 고통을 직면한 순간, 내 행위는 바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행위란 내 삶에 편리함, 안락함, 기쁨 등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내가 먹는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선 꼼장어가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채 불 위에 올려져야 한다. 나와 타자가 분리된 이분법적인 전제 위에서 살아온 내게 불교는 타자의 고통을 직면하게 하는 사건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타자의 고통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에서 시작된 질문은 곧 타자와 나의 연결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타자와 내가 분리될 수 없는 관계 속에 있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러한 질문은 나와 세상이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 위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제를 깨뜨리지 않는 이상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금욕주의나 도덕주의로 빠질 심산이 크다. 그렇다면 내가 탐구해야 할 것은 세상과 나의 연결성에 대한 이치를 명료하게 아는 것이다.

나는 세상과 나의 연결성을 탐구하기 위한 텍스트로 『반야심경』을 택했다. 반야심경의 ‘반야(般若)’는 ‘지혜’를 의미한다. 여기서 ‘지혜’는 ‘세상은 나 홀로 존재할 수 없음,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음을 명확히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야심경』은 이러한 이치가 담긴 600여권의 반야부 경전의 핵심을 한 권, 260여 자에 응축해 놓은 경전이다. 하여 나는 『반야심경』을 통해 그동안 외면하고 있던 꼼장어와 나와 사이의 연결성을 되찾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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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과 친해지기

『반야심경』에 대한 해석으로 넘어가기 전에 『반야심경』의 배경과 불교에서의 위치를 조망해 보자. 기원전 5세기경, 석가모니 부처 입멸 직후 부처님의 법이 와해되고 흩어질 것을 염려한 마하가섭의 주도하에 제1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은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암기하고 있는 장로급 비구 500인이 라자가하의 칠엽굴 부근에 모여 이루어 졌다. 이때 아난다가 부처님의 말씀인 ‘경’을, 우팔리가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의 목록인 ‘율’을 송출한다. 이들이 송출한 내용을 나머지 비구들의 동의를 얻는 과정을 거쳐 ‘경’과 ‘율’을 정립한다.

초기 불교의 가르침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제1차 결집과 제2차 결집(혹자에 따라서는 제3차 결집까지)까지는 이렇듯 문자가 아닌 비구들의 음성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립하는 합송 작업이 이루어진다.

1차 결집으로부터 약 100년 뒤, 당시 인도의 밧지 족 출신 비구들이 출가자의 계율을 어기고 있다는 소문이 만연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야사 장로를 주축으로 한 2차 결집이 이루어졌다. 약 700인의 비구가 모인 2차 결집에서 야사 장로 및 계율의 정통을 중시하는 비구들에 의해 밧지 족 비구들의 행위는 계율에 어긋난다는 결론이 났으며, 이에 불복한 밧지 족 비구 및 타 지역 비구들이 연합하여 계율의 정통성의 주장하는 비구들과 대립 분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훗날 불교가 여러 파로 나뉘게 되는 시작점이라 하여 ‘근본 분열’이라고도 불린다.

위 사건으로 인해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초기불교에서 여러 갈래의 부파로 나뉘는 ‘부파 불교’ 시대가 도래한다. 초기불교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송(口頌)의 형태로 전해졌다. 부파 불교에 이르러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내용 즉 ‘경’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는 작업에 돌입한다. 이렇게 생겨난 내용이 ‘논論’이며, 비로소 ‘경⋅율⋅론’ 삼장이 성립된다.

부파 불교는 ‘아비달마(abhi-dharma) 불교’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서 아비 abhi는 ‘~에 대해서, ~에 관해서’라는 뜻이며, 다르마 dharma는 ‘부처님의 법’이라는 뜻이다. 하여 ‘아비달마’를 ‘부처님의 법의 연구’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부파 불교는 ‘아비달마’라는 그 이름처럼 부처님의 법을 연구하는 데에 집중했다. 당시 불교는 인도의 전륜성왕이었던 아쇼카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아쇼카왕은 출가 승려들이 종교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거대한 사원을 지어주고, 불교 승단의 번영을 위해 인도 각지에 스투파(불탑)을 건설한다. 이러한 아쇼카왕의 지원은 승려와 대중과의 괴리를 가속화했다. 중생을 위한 깨달음은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이었으나, 불교 학설의 개념에만 몰두하느라 대중과 멀어지는 부파불교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대승불교가 탄생한다.

대승불교가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비판한 이유는 위에 나열한 내용들뿐 아니라, 부파 중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설일체유부’는 다른 모든 것에는 자성(自性), 즉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지만 부처님의 법은 실재한다는 교설을 설파했다. 이는 ‘모든 것에는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대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에는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포함되기 때문이다. 하여 부처님께서는 스승의 말이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스스로 물어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점점 전문화되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부파 불교의 행태에 대한 반박으로 대승 불교 운동이 진행된다. 대승 불교가 기존의 설일체유부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법에는 실체가 있다’라고 하는 교설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된 운동인 만큼 대승 불교 운동은 기존의 불교 개념들을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모든 것은 실체라고 할 만한 것 없이 ‘비어있음’을 뜻하는 ‘공(空) 사상’이다.

 

들어본 사람만 있는 그 구절, ‘색즉시공 공즉시색’

『반야심경』의 핵심은 공(空)이다. 공은 ‘모든 것의 실체는 비어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것의 실체는 비어있다’는 통찰이 어떻게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지혜로 연결되는 것일까?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의 자성> 그것이 공성이다. 공성인 그것이 색<의 자성>이다.
(김명우, 『범어로 반야심경을 해설하다』, 민족사, 133쪽)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아주 유명하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이것이 불교 개념이기도 하고 그중에서도 공이라는 심오한 뜻을 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구절에는 물질을 의미하는 색(色)과 모든 존재의 비어있음을 뜻하는 공(空)이 함께 있다. ‘색과 공이 서로 다르지 않음(色佛異空 空不異色)을 넘어서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찬찬히 풀어보며 위 질문의 답을 구해보자.

‘색즉시공’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오온(五蘊)에 대해 살펴보자. 불교에서는 생멸, 변화하는 모든 것 즉,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요소가 있다고 보는데 그것이 바로 오온이다. 오온은 물질을 의미하는 색(色), 대상을 통해 느끼는 감각인 수(受), 그 감각으로부터 생겨나는 이미지인 상(想), 그 뒤로 생겨나는 의지적 행위(마음작용을 포함한)인 행(行), 앞의 경험에 의해 생겨난 판단 혹은 분별력인 식(識)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온은 개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하나의 과정과 같다. 색이 없다면 수도 없고, 수가 없다면 상도 생겨나지 않는다. 하여, 오온 중 하나인 색에 대한 분석을 통해 오온이라는 프로세스 자체가 공함을 설명할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도 앞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언급한 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라는 구절을 덧붙임으로써 색이 공함과 같은 원리로 수상행식 역시 공하다는 것을 축약하여 설명한다.

색은 물질이다. 우리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예시로 색의 공함을 알아보자. 자동차의 무엇을 자동차라 부를 수 있는가? 차가 굴러가게 해주는 바퀴인가? 그럼 길 위에 네 바퀴만 덩그러니 있다면, 그걸 자동차라 부를 수 있는가? 아니면 동력을 생산하는 엔진을 자동차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연료가 없다면 엔진은 작동조차 불가능하다. 이렇듯 자동차 아닌 것들을 모아 놓은 것을 우리는 ‘자동차’라고 부른다.

이런 원리는 모든 물질에 적용되며 ‘나’라고 불리는 몸뚱이(色)에도 적용된다. 손이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발이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다리가, 심장이, 폐와 뇌가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내 신체를 구성하는 필수 영양소 중 하나인 단백질을 외부의 음식으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면 나는 죽을 것이다. 달걀에 의해 내 몸이 이렇게 유지될 수 있다면, 나라고 할 만한 것에 달걀도 포함되는 것인가? 꼼장어 역시 마찬가지로 꼼장어라고 불릴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꼼장어의 간, 심장, 근육, 껍질, 촉수, 퇴화된 눈, 꼼장어가 천적을 만나거나 위험한 상황에 닥쳤을 때 몸에서 뿜어내는 점액질 등의 일시적인 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그 위에 ‘꼼장어’라는 이름을 덧붙인 것이다. 이렇듯 모든 물질(色)은 여러 인연들이 합쳐져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에 ‘색의 자성은 공성이다(色卽是空)’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즉시색은 어떠한가? 꼼장어라는 색의 자성은 간, 심장, 껍질 등 각각의 개체로 보자면 꼼장어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의 합이므로 공(空)이다(色卽是空). 간, 심장, 껍질 등이 각각 따로 있을 때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인연조건에 의해 하나로 결합 되었을 때 꼼장어라는 일시적 현상으로 드러난다(空卽是色). 이렇게 각기 떨어져 있을 때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들이 다른 인연으로 모이면 내가 되고, 꼼장어가 되는 것이다.

꼼장어와 나는 경계 없음을 알 수 있었듯, ‘꼼장어’로 이름지어진 ‘그것’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꼼장어’는 있다, ‘나’도 있다. 다만 잠시 생겨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있으면서 없는 무지개와 같이). 그것이 실재한다는 착각이 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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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장어’는 있다, ‘나’도 있다. 다만 잠시 생겨난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있으면서 없는 무지개와 같이. 그것이 실재한다는 착각이 무명이다

 

고통이라는 현상만 있을 뿐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통해 만물의 공함과 드러남(色)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공에 대한 탐구가 꼼장어의 고통과 나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꼼장어의 고통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라는 질문은 나와 꼼장어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한 상태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의 차원에서 본다면, ‘나’ 혹은 ‘꼼장어’라고 할 수 있는 경계는 없다.

꼼장어와 나의 경계가 사라지면서 ‘꼼장어의 고통과 나’에서 ‘고통’이라는 현상만이 남는다. 나도 꼼장어도 없이 고통이라는 현상만이 드러난다. 이 시점이 공성, 반야 지혜의 순간이다. 『반야심경』의 후반부에 이러한 구절이 등장한다.

능제일체고 진실불허고 能除一切苦 眞實不虛故
일체의 괴로움을 소멸하여 진실하며 헛됨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책, 203쪽)

이 구절 앞에 반야바라밀다 주문이야말로 크게 신비롭고, 밝고, 비견할 바 없는 뛰어난 주문이라는 내용이 있고, 그 뒤에 위의 인용구가 등장한다. 반야바라밀다 주문은 『반야심경』의 핵심인 공성의 지혜를 뜻한다. 공성을 통해 나와 타자의 경계가 사라지고 고통이라는 현상만이 남은 상황에서,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넘을 수 있다’라는 뜻의 능제일체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괴로움의 실체화는 세상과 나를 분리시킬 때 생겨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휴대폰에는 변기의 10배 정도 되는 세균이 있다고 한다. 매우 깔끔한 성격을 가진 나의 지인은 이 사실을 알게 된 후로 매일 휴대폰을 닦는다고 한다. 나는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서 휴대폰을 거의 반년 넘게 안 닦은 것 같다. 휴대폰에 서식하는 세균이 내 삶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중요한 것은 문제가 되느냐 아니냐이다. 어떤 사건이 문제가 되는 순간은 ‘나’라는 무명으로 세상과 나 사이에 경계를 만들 때이다. 공성은 ‘나’의 경계를 허물면서 고통이라는 현상과 하나 되었기에 고통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며, 더 이상 괴로움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불은 불에 타지 않으며, 물은 물에 젖지 않고, 바퀴벌레는 바퀴벌레를 더럽거나 징그럽다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히 모든 고통을 넘어갈 수 있다(能除一切苦)’는 말의 의미일 것이다.

나는 공의 시선을 통해 꼼장어의 고통과 나와의 관계성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나와 꼼장어라는 자타의 구분을 지워버리고 고통이라는 현상만 남았다. 고통 역시 공한 것 아닌가? 그렇다. 고통은 단순하게 보자면 꼼장어와 숯불이라는 조건이 만나 생겨난 현상이다. 그 안에는 다시 무수한 인연들이 얽혀 있으므로 고통 역시 한낱 현상에 불과하다. 고통의 근본이랄 것은 없지만, 여전히 고통이라는 현상은 나타난다.

여기서는 그저 고통이라는 현상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고통에 대한 가장 적절한 대응은 역시 고통의 소멸일 것이다. 내 손에 박힌 가시를 빼는 이유는 가시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꼼장어가 불에 타는 고통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어차피 꼼장어의 고통이니까 나와는 상관없지 않아?’라는 질문은 성립할 수 없다. 그저 ‘고통’이라는 현상에 대한 대응만 있을 뿐이다.

고통이 소멸의 대상이라면, 나는 고통의 소멸이라는 흐름에 뛰어들어야한다. 이것은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이나 도덕적 선택이 아니다. 나와 타자의 구분이 사라진 상황에서 고통을 소멸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은 마치 내 손에 박힌 가시가 주는 고통을 없애고 싶은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선택이다. 이 세상 누구도 고통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통을 소멸하겠다는 방향성을 어떻게 내 삶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끌어올 수 있을까?

 

도덕적 선택이 아닌 타당한 선택

이 고민은 내가 꼼장어를 먹을 수 없게 된 사건에서 비롯되었으므로 나의 먹는 행위에 대한 변화를 주는 것이 좋겠다. 또한 먹는 행위는 매일 이루어지는 일상이므로 고통을 소멸하는 흐름을 일상적의 차원에서 자주 실행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좋다. 그렇다면 고통을 소멸하는 방향으로서 나의 먹는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원칙을 만들어 보자.

고통의 소멸을 고려한다면, 동물의 고통을 수반하는 육식은 역시 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가 생긴 이후로 지금까지 줄곧 고기를 먹어왔던 내가 단번에 육식을 끊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내 삶의 노하우를 동원해야겠다. 나는 담배를 끊은 지 2년 정도 되어간다. 지금은 담배에 대한 의식 자체가 별로 없다. 호기심에 시작했던 담배는 금방 중독되어 내 일상에 침투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가 나한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달고 살았다. 그러면서도 담배를 끊지 않은 이유는 담배 한 개비 피워봤자 건강에 큰 악영향을 주진 않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담배를 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사주명리학을 배우면서 오행을 알게 되었다. 오행을 통해보니, 나는 물(水)이며, 금생수(金生水)의 원리로 나를 살리는 기운은 금(金)이었다. 금은 오장육부 중 폐와 연결되어 있는데, 담배는 폐에 직격탄이다. 이런 원리를 알게 되자 내게 담배를 끊겠다는 마음이 확 일었다. 담배를 끊을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담배를 끊기 위해 실천한 방법은 단 하나였다. 그것은 바로 담배를 사지 않는 것(정확히는 담배를 사서 내가 소유하지 않는 것^^). 이것은 담배가 없으면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단순한 발상에서 시작된 실천이었다. 내가 실험해 본 결과 담배를 참는 것보다 담배를 사지 않는 것이 훨씬 쉽다. 눈앞에 담배가 보이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나는데, 담배를 사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날 조건이 선제적으로 소멸된다. 그리고 담배를 끊어야 한다는 규칙은 이미 담배를 몇 년 간 피워온 내게 너무 직접적으로 다가와 압박이 될 수 있지만, 담배를 사지 않는 것은 우회적인 방법이기에 그 규칙을 지키기 훨씬 편했다.

나는 담배 피우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흡연자 친구들을 만나면 맘껏 담배를 얻어 피웠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면 담배를 피우지 않는 시간을 갖는다. 때론 내가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흡연자 친구에게 담배를 사주고 그 담배를 얻어 피운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이 뭐 이렇게까지 해서 피우냐!’라는 마음이 확 들면서 더 이상 얻어 피우지도 않게 되었다. 담배를 계속 얻어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위와 같은 원리를 먹는 행위에 적용해 보자. 육식을 단번에 포기하기는 어려우니, 우선 육고기에 한하여 제한을 둬보자. 원칙은 지키기 쉬워야 하고, 단순하며, 오래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원칙이 바로 ‘나 혼자서는 육고기 혹은 육고기로 만든 음식을 사 먹지 않겠다’이다. 이 원칙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혼자 음식을 먹을 경우, 나의 미각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강력하게 발동한다. 예를 들어 혼자 돈까스를 사 먹을 경우, 온전히 나의 미각적 쾌락만을 위해 돼지의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하여 나 혼자 있을 때는 육고기를 사먹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과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 매번 육고기를 피해 가긴 어려우므로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는 마음 편히 먹는다. 내가 식사를 대접받는 경우라면 이것저것 음식의 종류를 선택하기 어려운 입장이므로 그럴 때도 어떤 음식이든 맘 편히 먹는다. 물론 꼼장어는 먹기 힘들 것 같다. 위와 아래의 경우 나중에 나의 육고기를 먹지 않는 실천의 힘이 강해지면, 그 정보가 주변에 흘러서 자연스럽게 육고기가 아닌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될 테니 그때까진 마음 편히 먹는 것이 좋다.

위 원칙에 ‘나 혼자 있을 때’라는 단서를 단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아버님 생신이라든가, 내가 친구들에게 밥을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기왕 밥을 먹는 거 내가 대접하는 대상이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것을 사주는 것이 좋다. 내가 음식비용을 지불하더라도, 누군가와 함께 먹을 경우에는 육고기를 먹을 수 있다.

무언가를 사지 않는 것의 효과에 대해 말해보자. 돈의 흐름은 욕망의 흐름을 보여준다. 카드 이용 내역에 등장하는 나 혼자 먹은 치킨, 돈까스 등을 보면 내 욕망이 미각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방향성을 유지한다면 세상의 고통을 소멸하는 방향과는 점점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고기 음식을 사 먹지 않는 것은 나의 욕망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 ‘담배 사지 않기’역시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온 아이디어였다. 하여 ‘나 혼자 있을 때 육고기 음식 사 먹지 않기’라는 원칙은 앞으로의 실천을 통해 수정될 것이다. ‘담배 사지 않기’가 ‘담배 끊기’라는 방향을 지향했듯이. ‘나 혼자 있을 때 육고기로 만든 음식 사 먹지 않기’는 ‘세상의 고통을 소멸하기’라는 방향성 위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세상의 고통을 소멸하는 식습관’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약 일 년 전쯤, 친구들과 치킨집에서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친구들과 치킨을 기다리는 동안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너는 육식을 포기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 나왔다. 거기에 대해 이런 대답이 나왔다, ‘만약 내 앞에 버튼이 하나 있고 그 버튼을 누를 때마다 닭이 한 마리씩 죽는다면, 나는 그 버튼을 누르지 않을 것이다. 같은 원리로 내가 치킨을 먹지 않음으로써 닭을 한 마리씩 살릴 수 있다면 나는 치킨을 먹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던 중 치킨이 나왔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마주치곤 ‘일단 이건 먹자!’ 한 뒤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위의 이야기는 나의 먹는 행위가 누군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의 행위가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치킨을 맛있게 먹었다. 내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생기 넘치는 닭이 아닌, 바삭한 치킨 옷을 입은 맛있는 치킨이다. 그래서 이것을 먹는 데에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치킨이 주는 맛을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굳이 치킨이 닭이라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제 꼼장어의 고통은 나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고통은 현상 그 자체로써 세상 곳곳에 피어난다는 것을. 앎은 곧 행위가 된다. 내가 꼼장어가 숯불 위에서 몸부림치는 장면을 본 뒤로 꼼장어를 먹지 못하게 된 것처럼. 나는 삶에서 ‘세상의 고통을 소멸하는’흐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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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먹는 행위가 누군가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나의 행위가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기쁨으로 채우는 삶

위에서 ‘나’ 혹은 ‘꼼장어’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없고 잠시 결합된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비어있다고 하니 자칫 삶의 허무를 느낄 수도 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여도 신체를 이루던 물질들이 흩어졌다가 꼼장어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끝없는 윤회가 반복 되므로 허무에 몸을 맡기는 것 역시 답이 아니다.

나는 비어있지만, 여전히 비어있는 ‘나’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빈 곳을 행복과 기쁨으로 채우면 되는 것 아닐까? 이것은 단순히 육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다짐 혹은 금욕주의가 아닌, 세상의 고통의 소멸로 향하는 자유의 길이다.

손가락에 박혀 계속 나를 괴롭게 하던 가시를 쑥 빼냈을 때 마침내 홀가분한 자유의 순간을 맞이하듯이. 괴로움의 소멸은 쾌감을 동반한다. 그것은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기쁨이다. 하여 고통을 소멸해나가는 삶은 자유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얼마 전 새해인데 밥이라도 한 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아버님의 연락에 나는 아버님이 계신 곳으로 향했다. 나는 아버님께 무엇을 드시고 싶으신지 여쭤보았고, 그 대답은 역시 꼼장어였다. 나는 아버님께 다른 음식을 먹자고 했다. 예를 들면 갈비 같은 건 어떠냐고. 아버님께서는 의외로 순순히 나의 제안에 응하셨다.

아버님께서 나를 데려간 곳은 소갈비 전문점이었다. 나는 처음에 소갈비라는 말을 듣고 비싼 가격일까 긴장을 했다. 아버님이 말씀해주신 곳을 검색해보니 저렴한 가격에 소갈비를 먹을 수 있는 곳이어서 안심하고 갈비를 시켜 먹었다. 그러나 정작 아버님께서는 소갈비보다 따로 시킨 된장찌개를 가장 맛있게 드셨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아버님이 고집을 부리시더라도 된장찌개를 먹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이번에는 운 좋게도 새해가 오기 전에 이 글을 쓰고 있었고, 아버님께서도 꼼장어 대신 갈비를 먹자는 제안을 받아주셔서 무사히 지나갔다.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소멸할 것인가? 내가 앞으로도 계속 품고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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