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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강감찬 청년캠프] 관계가 나를 먹이고 또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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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5-04-08 09:09 조회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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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나를 먹이고 또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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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영 (2024 강감찬 청년캠프)

 

『종의 기원』의 ‘6장, 이론의 난점’ 파트에서는 SF판타지 같은 상상이 펼쳐진다. 날치의 지느러미가 새의 날개로 진화하고, 곰이 물속에서 입을 크게 벌려 먹이를 먹다가 고래가 되는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날치는 새의 날개를 ‘갖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고, 곰은 고래가 ‘되기 위해’ 물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날치와 곰은 목적을 상정해두고 능력을 키운 것이 아니다. 다윈에 의하면 ‘살기 위해’ 애쓰다 보니 생존에 유익한 변이가 생겼고, 이 차이를 누적시켜 가며 본래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기관이나 종이 탄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을 미래에 상정해 두고 못 가진 능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탐내고 애썼던 이유는 나 역시 ‘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내가 살기 위해 애쓰다 보니 유익한 변이로서 원했던 것들을 성취하게 된다고 해보자. 다윈의 관점에서라면 이런 방식으로도 본래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환골탈태가 가능한 것 아닐까?

맞다. 다윈도 그렇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어서 다윈은 중요한 점을 놓쳤다고 덧붙일 것이다. 내가 목적으로 상정한 유익한 변이는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유익한 변이를 결정하는 것은 ‘나’가 아니다. 바로 ‘관계’다. 특별히 잘하는 게 없어도 열심히만 살면 언젠가 원하던 바를 이룰 줄 알았다. 그런데 결정권이 ‘관계’에게 있다니! 참 생뚱맞고, 당황스럽다. 어디서든 먹고 살려면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계가 나를 먹이고 살린다고? 다윈은 왜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관계라고 말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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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먹고 살려면 남들보다 뛰어난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관계가 나를 먹이고 살린다고? 다윈은 왜 생존을 결정하는 것이 관계라고 말하는 것일까?

 

생존 투쟁 = 생존 관계

‘모든 종은 살기 위해 애쓴다’는 문장을 다윈의 용어로 바꾸면 ‘생존 투쟁’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종의 기원』을 공부하면서 생존 투쟁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의 감정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절망스러웠다. 자연의 보편적 현상으로서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는 전제가 다소 슬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불교에서 ‘삶은 고(苦)다’라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이러한 전제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분투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능력이 생겨서 기존과 달라졌다면 그 이후에는 안락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언제까지 생명체는 죽는 순간까지 힘겹게 분투만 하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삶을 좀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순 없는 걸까?

다윈이 사용하는 생존 투쟁의 개념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여기서 내가 생존 투쟁이라는 용어를 넓은 의미로 그리고 비유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전제할 필요가 있겠다. 즉 이 용어에는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존한다는 뜻도 포함되며, (이것이 더 중요한 사실인데) 개체의 생존뿐만 아니라 자손을 남기는 성공 또한 포함된다.(『종의 기원』, 찰스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사이언스 북스, 120쪽)

 

다윈이 사용하는 생존 투쟁은 ‘관계’ 그 자체다. 생존 투쟁이라는 단어 자체에 ‘싸움’의 의미가 강하게 들어 있어서 경쟁하는 관계만 내포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윈은 생존을 위한 분투에는 경쟁뿐만 아니라 한 존재가 타자에게 의존하는 관계성까지 포함하고 있다. 생존 투쟁의 장은 나 혼자 고군분투 곳이 아니다. 다른 존재와 경쟁을 하기도 하고, 긴밀한 의존도 하는 복잡한 관계를 맺는 네트워크 자체가 생존 투쟁이다. 또한 더 나아가 나 혼자 살아남는 생존이 아니라 타자를 낳는 성공까지도 생존 투쟁에 포함된다.

생물들이 살기 위해서 맺는 경쟁 관계와 의존 관계는 자연에서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까. 가령, 사막에서 자라나는 식물은 가뭄에 대항하여 생존 투쟁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정확히 표현하면 사막의 식물은 습기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생존 투쟁의 개념과 더 가깝다. 또 이런 상황은 어떠한가.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에 붙어서만 살아갈 수 있다. 이때는 겨우살이가 다른 나무와 의존하는 관계를 갖지만, 같은 가지 위에서 몇몇 겨우살이들과 함께 살게 된다면 겨우살이끼리는 경쟁 관계로서 생존 투쟁을 하게 된다. 서로 대립하는 관계와 의존하는 관계는 생물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동시에 벌어진다.

이것은 우리 눈에 관찰되는 경우만 나열했을 뿐이지 사막의 식물과 겨우살이가 다른 존재와 맺고 있는 복잡한 관계망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도 무지하다. 어쨌든 경쟁과 의존 관계 모두 결국 생존을 위해서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 경쟁을 하려고 해도 누군가가 필요하다. 타자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경쟁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쟁 관계도 결국엔 의존 관계 위에서 성립된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와 대립하고 또한 의존하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개체의 생존 성공에는 타자가 필수적이다.

타자와 대립하든 의존하든 모든 생존 투쟁은 힘겹고 어렵다. 어떤 관계 양식이든지 간에 타자와 상호 작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생명은 고단한 생존 투쟁을 생명의 기본 전제로 갖게 되는 것일까? 다윈은 “모든 유기체는 빠르게 증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생존 투쟁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저출산이 문제라고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계산해 보면 번식 속도가 느린 인간조차 몇 년 동안 아무도 죽지 않고 태어나기만 한다면 지구에 서 있을 공간조차 없어진다. 한정된 공간에 여러 종이 함께 살기 위해서는 무한 증식을 막는 역할이 필요하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생존 투쟁이다. 생존 투쟁 속에서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소멸한다. 개체수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무한한 죽음도 필요하다. 죽음이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생존 투쟁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든 개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분투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생존 투쟁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떤 생명체가 소멸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경쟁자와 천적이다. 상식적으로는 어리고 힘없는 개체들이 가장 빨리 소멸할 것 같지만, 오히려 다양한 적에 의해서 죽음이 상당량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죽음 외에 개체 수, 영역의 크기도 “그 주변에 해를 입히는 동물들이 얼마나 많이 존재하느냐에 주로 의존”한다. 내가 어떤 능력을 갖춘 것과는 별개로 상호 관계성이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경쟁자로 인해 어떤 종이 대량으로 파괴되면, 파괴된 생물을 먹고 살던 생명에게도 치명타가 생긴다. 먹는 존재이자 먹히는 존재로서 엮여있는 생존 투쟁의 네트워크는 촘촘하고 긴밀하다.

 

수 세기 동안 매년 각자 수천 개의 씨앗을 퍼트리면서 벌였던 나무들 사이의 투쟁을 보라. 곤충들 간의 전쟁은 또 어떠한가? 곤충, 달팽이, 그리고 새를 포함한 다른 동물들과 맹수들 간의 전쟁도 있다. 이 모두는 수를 늘리기 위해 애를 쓰고, 서로가 서로를 먹고 살거나, 나무나 그 씨앗이나 그 싹을, 또는 처음에 지면을 덮고 있어서 나무들의 성장을 방해했던 다른 식물들을 먹고 살지 않는가! 현재, 옛 인디언의 폐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수와 종류를 지난 수세기 동안 결정해 온 이 무수한 동식물의 작용과 반작용을 떠올려 보라. 그에 비하면 깃털의 낙하 문제는 얼마나 단순한가! (같은 책, 134쪽)

 

어떤 새가 새끼를 먹이기 위해 물어온 곤충을 보면 어떤 감정이 드는가. 곤충도 누군가의 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잡혀 온 곤충도 생존을 위해 무수히 많은 타 생물을 잡아먹으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가 있을까. 누구든 먹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먹는 관계는 아주 치열한 대립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의존 관계이다. 자연의 복잡하고 끈끈한 관계 양식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도 무지하다. 모르기 때문에 수많은 생명체 간의 완벽하게 상호 적응된 모습과 스스로 개체수를 조절하는 것을 보며 초월성을 끌어들인다. 다윈에 따르면 완벽할 정도의 상호 적응과, 개체 수, 종의 소멸을 결정짓는 것은 ‘관계’다. 따라서 생존 투쟁은 다른 말로 바꾸면 ‘생존 관계’다. 생명체들이 삶을 보존하기 위해 펼치는 먹고 먹히는 관계 양식에는 선악을 따질 수 없다. 그저 모두 각자 자신의 관계 위에서 최선을 다하며 애쓰고 있을 뿐이다.

살기 위해 애쓰는 생존 투쟁 위에서 살아남는 것은 누구일까? 포식자를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내가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삶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뛰어넘는 강한 실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다고 할 때 다른 고양이보다 날쌔야지만 먹이를 쟁취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생존 투쟁의 장에서도 상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갖춰야만 나의 생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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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과 의존 관계 모두 결국 생존을 위해서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 경쟁을 하려고 해도 누군가가 필요하다. 타자라는 존재가 있어야만 경쟁을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경쟁 관계도 결국엔 의존 관계 위에서 성립된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하기 위해서 다른 존재와 대립하고 또한 의존하며 치열하게 살아간다. 개체의 생존 성공에는 타자가 필수적이다

 

유익한 변이는 ‘관계’가 결정한다

다윈이 살았던 19세기에는 생명의 본성을 ‘본질’이라고 생각했다. 종을 구분 짓는 명확한 구분 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윈이 이 책을 쓰던 당시에는 “어떤 것을 종으로 분류해야 할지 변종으로 분류해야 할지에 대해 박물학자들 간에 합의점을 찾지 못할 정도”로 학자마다 각기 다르게 분류하고 있었다. 동일한 식물을 가지고 어떤 식물학자는 충분히 종으로 인정하지만, 다른 식물학자는 단순히 변종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았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영국산 식물을 182종으로, 다른 누구는 251개의 종으로, 또 다른 사람은 112개로 제시한다. 누구에게는 의심할 바 없는 종이 되고, 또 누구에게는 변종이나 지역적인 품종으로 분류되는 이 현실! 다윈도 갈라파고스 제도의 여러 섬을 돌아다니며 새의 종들을 비교해 보았다. 그는 “종과 변종 사이의 구별이 너무나도 모호하며 임의적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한다. 종을 각기 다르게 분류하던 현상은 당시 생물학이 미흡하거나 분류 체계가 허술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실제 생명체의 속성 자체가 서로 뚜렷하게 구분될 수 없었던 것이다.

종과 종을 구분할 수 없는 본질의 애매모호함. 이것은 특정 종을 독립적으로 구별 지어 주는 ‘본질’이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준다. 다윈은 복잡하고 긴밀하게 얽힌 유기체의 관계를 보며 생명의 본성이라는 자리에 ‘변이’를 놓는다. 변이는 생명의 본성이기 때문에 태어난 이상 “어쨌든” 생물에게 주어진다. 그러다 생의 어느 시점마다 생존 투쟁을 하다 보면 개체의 생존에 유리한 변이가 생길 것이다. 생존에 아주 미세하더라도 개체에게 이익이 되는 변이가 있다면 자연은 그것을 보존하고 지켜준다. 다윈은 이러한 원리를 ‘자연 선택’이라고 부른다.

유익한 변이가 생기기 위해서는 생존 투쟁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관계 속에 접속을 해야 변이가 유익한 것인지 해가 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산맥에서 살고 있는 늑대 한 마리를 예로 들어 보자. 늑대의 서식지에는 다양한 먹잇감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먹이를 구하기 어려운 혹독한 겨울에 자주 먹던 사슴이 갑자기 수가 증가했거나, 혹은 다른 먹잇감의 수가 감소한 상황이라고 해보자. 이런 생존 투쟁 상황에서는 빠른 사슴을 쉽게 잡을 수 있는 속도가 빠른 늑대가 생존할 가능성이 크다. 이전에는 몸집이 크거나 힘이 센 늑대가 다른 먹이를 잡는 데 유리했어도 지금 늑대와 사슴의 관계에서는 빠른 속도가 유익하다. 따라서 자연은 재빠른 늑대를 선택하여 보존할 것이다. 생존에 절대적으로 유익한 변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현재 생물이 처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생존에 유리한 것을 선택한다. 따라서 유익한 변이를 판단하고 선택하는 주체는 ‘관계’다.

나는 살아가는 데 유익한 변이를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특정 시점마다 무엇이 내게 유익한 변이가 될지를 스스로 결정했다. 학생일 때는 성적을 잘 받고, 회사원일 때는 일의 성과가 좋아야 하고, 공부하는 백수일 때는 글을 잘 써야 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래서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체가 지닌 기술이나 능력, 재주였다. 그러므로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도 타자가 아니라 그것들을 성취하기 위해 더 노력하는 ‘나’였다. 타자는 단순히 나의 수준을 비교할 수 있는 척도로서만 작동할 뿐이었다. 나의 치열한 삶 속에서 타자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내가 지금보다 더 나은 실력으로 성장하기만 한다면 분투도 언젠가 끝날 거라고 막연히 기대했다. 관계가 보이지 않으니, 시선이 오로지 ‘나’에게 꽂혀있었다. 그래서 유익한 변이를 성취하면 열심히 한 나의 노력 덕분이고, 유익한 변이를 얻지 못한 것도 나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었다.

또한 나는 먹고 살 수 있는 기술과 재능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그걸로 먹고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빵을 굽는 기술, 머리를 손질하는 기술,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다루는 재능 등. 어떤 분야든 상관이 없다. 그저 그런 기술 하나만 있으면 내가 늙어서도, 혹은 다른 나라를 가더라도 근근이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딱히 잘하는 것이 없었다. 무얼 배우려고 시도는 해봤지만 언제나 금방 좌절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먹고 살 수 있는 절대적으로 유익한 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자연 선택은 오로지 개체가 처한 ‘지금, 여기’ 조건과 맥락에 따라 유용한 변이를 결정한다. 내가 아무리 성적이 좋았고, 회사에서 실적이 좋았어도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장에서는 관계성이 달라졌기 때문에 무용해질 수 있다. 기존의 유익한 변이가 현재 맺고 있는 네트워크에 따라 아무런 유용성이 없어지거나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생명체가 각자 처한 관계적 맥락 위에서 개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개체는 관계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관계에 흠뻑 접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은 관계 밖에서 홀로 생존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호 관계에 대해 무지하여 점차 주위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고립되고자 한다. 관계에 대해 무지할 때 혼자 살 수 있다는 오만함과 타자를 보지 못하는 협소함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떤 개체에 변이가 일어난 경우, 그것이 얼마나 사소하든 그리고 어떻게 생겨난 것이든 간에, 생존 투쟁에 힘입어 그 개체가 그 종의 다른 개체들이나 외부 자연과 복잡한 관계를 맺는 데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되었다고 해 보자. 이때 변이가 일어난 그 개체는 보존되는 경향이 있을 테고, 일반적으로 그 변이는 자손에게 대물림 될 것이다. 따라서 그 자손 또한 생존의 기회를 더 많이 가질 것이다. 왜냐하면, 한 종 내에서 주기적으로 태어나는 많은 개체들 가운데 오직 소수만이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소한 변이가 유용한 경우에 보존되는 원리, 나는 이것을 인간의 선택 능력과 대비해 자연 선택이라 부르기로 했다. (같은 책, 118쪽)

 

자연 선택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지금까지 태어난 모든 개체는 아주 미세하더라도 유익한 변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의 삶을 보존하는데 이익이 되는 변이를 이미 안고서 태어난 것이다. 그 유익한 변이가 무엇인지는 우리의 좁은 시각으로는 알 수 없다. 너무나 미세하고 소량의 변이라서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익한 변이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복잡한 관계”를 맺는데 애써왔기 때문에 멸절하지 않고 살아올 수 있었다. 그러니 이제 유익한 변이를 개체의 능력으로 한정 짓지 말자. 복잡한 관계를 맺는 데 조금이라도 더 유리해지는 개체만이 자신의 삶을 보존하게 되고, 나아가 그 유용한 변이를 자손에게 대물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다윈에게는 상호 관계가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의 안녕”, 그리고 “장래의 번영 및 변화”까지도 결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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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가 각자 처한 관계적 맥락 위에서 개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개체는 관계 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고, 관계에 흠뻑 접속하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을 홀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은 관계 밖에서 홀로 생존할 수 있는 생명은 없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호 관계에 대해 무지하여 점차 주위의 관계를 단절하고 스스로 고립되고자 한다. 관계에 대해 무지할 때 혼자 살 수 있다는 오만함과 타자를 보지 못하는 협소함으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를 살리는 건 낯선 타자다

앞선 챕터에서 우리는 복잡한 관계를 잘 맺을수록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성에 접속해야 하는 걸까? 상식적으로 나와 유사하고 비슷한 관계 안에 있어야만 안전하고 생존에 유리할 것 같다. 하지만 ‘멸절’과 ‘형질 분기’의 원리에 따르면 나와는 다른 다양한 생명이 득실거리는 무리 속에서 생명은 더 잘 살아 나가게 된다. 왜 그럴까?

우선 멸절에 대해서 알아보자. 멸절은 모든 유기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개체수를 늘려감에 따라 생존 투쟁에서 덜 유리한 형태의 수는 감소하여 희귀해지는 것이다.

 

즉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운 종이 자연 선택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점점 더 희귀해져 결국은 멸절했다. 변이와 개량을 거듭하고 있는 것들과 가장 가까이에서 경쟁하고 있는 형태들이 당연히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생존 투쟁에 관한 앞의 장에서, 가장 심각한 경쟁은 일반적으로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근연 형태들 ― 동일한 종에 속한 변종들, 동일한 속 또는 동족인 속에 속한 종들 ― 간에 일어나는 경쟁이라는 것과 이는 그들이 거의 유사한 구조, 체질, 그리고 습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변종 또는 종 각각은 대개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그것들과 가장 가까운 다른 종들을 심하게 압박하고, 나아가 그것들을 전멸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같은 책, 177쪽)

 

나와 몹시 비슷하고 유사한 형태들 간의 투쟁은 나와 다른 속에 속한, 즉 나와는 많이 다른 낯선 존재들과의 투쟁보다 훨씬 더 치열하다. 개똥지빠귀의 수가 늘어나는 것이 노래지빠귀의 수를 감소시키는 원인이 되고, 러시아의 큰 바퀴벌레를 아시아의 바퀴벌레가 몰아낸다. 긴 뿔을 가진 소가 검은 소를 몰아내고, 그 긴 뿔을 가졌던 소는 짧은 뿔을 가진 소들에 의해 몰살된다.

멸절로 인해 공석이 생기면 자연은 빈틈없이 그 자리를 메꾼다. 검은 소의 자리를 긴 뿔을 가진 소가 차지하고, 또 긴 뿔을 가진 소의 자리를 짧은 뿔의 소가 차지한다. 생존 투쟁으로 인해 빈자리가 생기면 유리한 변이를 갖고 있던 개체가 공석을 차지한다. 빈자리는 새로운 관계로 채워진다.

자연은 유익한 변이를 대물림하기도 하지만 차이를 생산하는 힘 그 자체를 대물림한다. 왜일까? 매번 형질이 분기되고 다양할수록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다윈은 ‘차이 그 자체를 생성하는 힘의 계승’을 ‘형질 분기’라고 칭한다. 형질 분기의 원리에 따르면 생명은 본질을 유지하려는 경향성이 아닌, 끊임없이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 다양한 차이를 많이 만들어낼수록 그것이 자연의 관점에서도 생존에 유리해진다.

다윈은 형질 분기의 원리를 사람이 하는 인위 선택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애조가는 짧은 부리의 비둘기를 선호하고, 다른 애조가는 긴 부리의 비둘기를 좋아한다. 각각의 애조가는 자신의 선호에 맞춰서 부리가 점점 짧은 부리 혹은 긴 부리의 비둘기를 계속 선택하여 번식시킬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차이는 점점 벌어져서 마침내 두 개의 다른 아품종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인위 선택으로 인한 형질 분기는 자연계에서도 매우 효율적으로 실행된다. 형질 분기로 인해 “어떤 하나의 종에서 나온 자손들이 구조, 체질 및 습성에서 더욱더 다양해질수록 그것들은 자연의 계층 구조 안에서 더 많고 다양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 수를 늘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즉, 생명은 차이를 많이 생성할수록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동일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생명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구조, 습성, 체질적인 면에서 더 많이 달라지는데, 우리는 어떤 좁은 지역에서 서식하는 생물들이나 귀화한 생물들을 살펴봄으로써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하나의 종에서 시작되어 나온 자손들이 변이하는 동안, 그리고 모든 종이 개체수를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애를 쓰는 동안, 그들이 더 많이 변화할수록 생존 전투에서 성공할 확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같은 책, 199쪽)

 

어떤 서식지에 개체수가 많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조금이라도 유익한 변이로 인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그 변이는 대물림을 통해 계속 커져가고 다양해짐에 따라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구조가 더욱더 다양해질수록 더 많은 지역을 차지하며 개체수도 많아지게 된다. 다시금 개체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들은 계속해서 다양한 차이를 생산해 낸다. 생명이 끊임없이 기존과 다르게 변화해 가며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원리가 바로 형질 분기다.

나와 닮은 근연 형태의 무리와 나와 다른 다양한 생명의 무리와 관련된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동일한 면적의 두 개의 땅이 있는데, 한 곳에는 한 종의 씨앗만을 뿌린다. 그리고 다른 한 곳에는 서로 다른 몇몇 속의 씨앗을 뿌린다. 어떤 곳에서 더 많은 식물과 건초가 자랄까? 바로 후자의 경우다. 나와 크게 다른 생물들이 많은 조건에서 오히려 생물들은 살아갈 확률이 더욱 높아진다는 것이다. 나와 유사하지 않은 다양한 생물들의 네트워크 속에 들어가면 누구든지 간에 그 조건 하에서는 더 많은 변화와 차이가 일어나게 된다. 반대로 나와 유사한 근연 형태의 조건과 상황에 처해있으면 생명의 의지와 상관없이 누구나 멸절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자연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나와는 다른 다양한 존재들이 북적거리는 네트워크에 접속할수록 우리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힘이 커지며 그에 따라 스스로를 보존할 확률 역시 높아지게 된다.

그러니 일단 생명답게 살기 위해서는 생명이 많은 곳으로 나와야 한다. 다양한 생명들이 우글거리는 그 어디든지 말이다.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많으면 많을수록 그 조건이 나를 살린다.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존재들이 나의 삶에 유익하고 다양한 차이를 만들도록 도울 것이다. 생명이 자신의 삶을 살리고 보존하는 것은 오로지 낯선 타자와의 마주침 속에서만 가능하다.

 

일상의 네트워크가 생명을 탄생시킨다

 수많은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고, 덤불에서 노래하는 새들과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는 곤충들 그리고 축축한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들로 가득 차 있는 뒤얽힌 둑(entangled bank)을 지긋이 관찰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다. 또한 서로 너무나도 다르고, 매우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얽혀 있는, 정교하게 구성된 이런 형태들이 모두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법칙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책, 649쪽)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생존 투쟁, 자연 선택, 멸절과 형질 분기는 지금 바로 우리 옆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관계 방식과 다르지 않다. 가족, 친구, 동료, 이웃 등과 맺고 있는 일상의 아주 평범한 관계 패턴이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고 복잡한 생명의 네트워크를 만든 패턴과 동일하다. 우리에겐 너무 익숙하여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관계가 우리를 사는 데 애쓰게 만들고, 생존에 유리한 변이도 만들어내며, 차이를 증가시키는 힘을 만들고 있다.

사실 생명은 만들어지는 조건 자체가 관계에서 시작된다. 개체의 교배 역시 낯선 타자와의 조건 속에서 가능하며, 생명은 모체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돌봄을 받는다. 특히 “활력과 생식 능력”이 있는 자손의 탄생은 ‘서로 다른’ 변종들 사이에서 혹은 동일한 변종이지만 ‘혈통이 다른’ 개체들 사이에서의 교배에서 가능하다. 혈통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암수한몸인 동물조차 자가 수정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자가 수정을 하지 않는다. 생존 투쟁이 자손을 남기는 성공까지 포함한다는 것을 상기해 보았을 때, 활력 있고 생식 능력이 있는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낯선 타자와의 교배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또한 그렇게 낳은 자식은 형질 분기의 원리상 부모와 현저히 다를 수밖에 없다. 낯선 타자와의 관계는 생명을 잉태시키고 탄생하게 만든다. 암수한몸인 동물은 효율성을 따진다면 굳이 다른 개체와 교배를 할 필요가 없는데, 왜 그러는 걸까? 생명의 본성은 동일성을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타자와 결합하며 타자를 낳고, 자기 자신조차 미세하지만 기존의 본인으로부터 계속해서 벗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나와 완전히 동일한 사유를 지니고 있거나 흡사한 사람들의 무리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그것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할까? 왜 나와 생각이 다르면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걸까? 근연종일수록 경쟁이 치열하며, 다양한 생명의 무리가 나를 더 살게끔 만드는데 말이다. 이는 생명에 대한 강력한 이분법이 작동하여 그러한 것은 아닐까. 나와 비슷할수록 선하고, 나와 다를수록 악하다는 선악의 프레임에서는 낯선 타자는 나를 위협하는 존재로서 인식될 뿐이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오로지 ‘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성과나 기술을 갖기 위해 나 홀로 생존 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저 혼자 갈고 닦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자. 학교에서의 성적과 회사에서의 성과는 오로지 내 노력과 의지로 얻은 것이었나? 나는 사실 성적에 관심이 있던 아이가 아니었다. 전교 최하위권에서 놀던 내가 전교 1등과 짝꿍을 하면서 공부에 흥미를 가졌다. 나와는 너무나도 달랐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는 기존과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다. 가까이하기 어렵거나 불편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그 자체, 그 조건에 과감하게 접속하는 것이 결국 나를 먹이며 또 살리고 있었다. 낯선 타자들과의 관계가 기존과 다른 나를 만들었고, 그 자체가 나의 성과가 되어 있었다.

진정으로 생명을 위한 삶이란 무엇일까? 진짜 생존을 위해 애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스스로의 삶을 잘 돌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다윈에게서 찾은 힌트는 이것이다. 낯선 타자와 끊임없는 접속! 나의 의지대로 원하는 변이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분투에서 벗어나 나는 이제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타자와 더 열렬히 접속하고자 한다. 앞으로 나의 삶에 유익한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도 ‘관계’적 상황과 내가 처한 조건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매일 일상의 관계에서 차이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너무 익숙하고 평범하며 미세하기 때문에 인지가 안 되거나 대단하다고 느끼지 못할 뿐이다. 나의 친구, 가족, 동료는 알면 알수록 나와는 너무 다른 존재들이 아니던가. 몇 십 년을 알고 지내도 그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 낯선 타자들과의 일상적 관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떨 때는 굉장히 다른 존재로 살게끔 만든다. 생명은 이렇게 차이를 분기시키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은 언제나 타자로부터 온다. 자연계에서 개체는 혼자서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다. 생명은 낯선 타자들이 우글거리는 네트워크 속에서만 잘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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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생명을 위한 삶이란 무엇일까? 진짜 생존을 위해 애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스스로의 삶을 잘 돌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다윈에게서 찾은 힌트는 이것이다. 낯선 타자와 끊임없는 접속! 나의 의지대로 원하는 변이를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분투에서 벗어나 나는 이제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타자와 더 열렬히 접속하고자 한다. 앞으로 나의 삶에 유익한 변화와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도 ‘관계’적 상황과 내가 처한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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