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는 집에서부터 도서관까지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 등교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집에서부터 급경사의 오르막을 15분가량 오르면 도서관이 나온다. 날이 쌀쌀한 날에는 몸을 예열하고 수업에 들어갈 수 있고, 더운 날에는 땀을 식히며 시원하게(?) 수업에 들어갈 수 있다. 작년과 올해 주로 공부하는 것은 티벳어다. 주된 시간을 언어 공부에 쏟으며 지내기는 인생에서 처음이다. 스페인에서 줌으로 나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주었던 해완언니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스스로의 새로운 인격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었다. 아직은 구멍 난 티벳어를 구사하고, 알아들은 단어 몇 개로 문장을 상상하는 수준에 있기에 나의 새로운 인격은 어린이에 머물러있다(이 친구가 어서 어서 성장했으면 좋겠다).
말이 서툴다는 것의 재밌는 점은 구업을 짓기 어렵다는 것이다. 거짓말, 거친 말, 쓸데없는 말, 이간질 하는 말이라는 4가지의 구업에 ‘꽃, 밥, 시계’ 등의 단어로는 도달하기 꽤나 어렵다. 나를 어린이의 인격에 가두는 티벳어는 내가 모르는 새에 구업을 짓는 것조차 못하게 해준다. 반대로 말을 정말 잘했으면 좋겠다 싶은 순간들도 있다. 상대의 슬픔을 위로하고 싶을 때, ‘고마워’ 말고 더 많은 말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싶을 때, 대놓고 말고 언뜻 걱정이나 배려를 비치고 싶을 때 등등이다. 이렇게 미묘하고 섬세해야 할 때 나의 말은 아직 너무 입자가 굵다.
말이라는 게 사람들 사이에서 왜 생겨났는지 여러 가지 설이 있겠지만, 심지어 뭐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들이 거짓말과 뒷담화를 통해 비상해졌다는 말도 있지만, 나는 티벳어를 배우면서 말이라는 게 어떨 때 필요한지 종종 느낀다. 한강 작가의 말처럼 언어는 우리의 마음을 이어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티벳어로 위로를 하려면, 한 번쯤은 티벳어로 위로를 받아봐야 한다. 나이가 들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조심히 가세요’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이 기억난다. 헤어지는 순간에 상대가 갈 길을 걱정하는 말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조심히’와 ‘가세요’라는 단어는 알지만, 그것을 조합한 말 속에서 내가 쓴 적 없는 마음을 배웠다. 말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해지고, 사람이 사람에게 쓰는 마음에 의지해있다. 그래서 다른 언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인격이 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