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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공장 에세이] 73세 어머니의 입원에도, 파도처럼 바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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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6-07 08:03 조회1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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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세 어머니의 입원에도, 파도처럼 바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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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승 희 (곰숙씨의 글쓰기공장)

 

73세 어머니가 돌발성 난청으로 입원하셨다. 작년 이맘땐 무릎 골절로 몇 개월 거동이 어려우셨다. 그 몇 개월 후 짝꿍의 아버님이 빙판길에 넘어져 수술을 하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나이를 먹고 있다. 11년 전 입양했던 아기 고양이는 이제 인간 나이 60대 어르신이 돼버렸다. 먹는 양도 활동량도 많이 줄었다. 이런 일상을 살다 보니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의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종종 들었다. 이대로 그냥 있다간 그들과 체온과 눈빛을 나누지 못하는 순간이 왔을 때 슬픔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이전 글(“너는 사자·바람·연꽃·무소의 뿔 그리고 자유!”)에 썼듯이, 나라는 인간을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으로 본다면, 죽음의 슬픔 역시 그 일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상상하면 슬픔에 압도되어 버린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그건 아닐 것 같은데… 죽음의 괴로움을 ‘무명’으로 통찰한 붓다의 지혜를 빌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노사(老死)’의 괴로움, 그 시작점을 ‘무명’이라고 붓다는 진단한다. 인간이 왜 노화와 죽음이라는 당연한 생명의 이치를 괴로움으로 겪는지, 인간은 왜 이런 괴로움을 안고 살 수밖에 없는지, 붓다는 현대의 인지 심리학자처럼 자신의 사유 과정을 정리한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12연기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다. 근원이자 시작점인 무명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생명계의 상호의존성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 생명의 연기적 흐름을 벗어나 홀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무명이다. 다시 말해 자아를 실체화하는 것이다.”(고미숙, 『청년 붓다』, 북드라망, 269쪽, 2022)

나라는 인간의 삶이 무수히 많은 것들에 의존한다는 걸 모르고, 내가 잘나서만 사는 줄 아는 게 무명이다. ‘생명의 상호의존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로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하고 싶은 건 다 해야 하고, 다 누려야 하고, 하고 싶은 걸 못할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하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나’는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행복해야 한다. 욕망 실현을 막는 것은 무엇이든 심지어 죽음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 끔찍이 싫을 것이다. 이런 ‘무명의 나’에겐 노사가, 노사로 향해 가는 생 역시 괴로움이 없을 수 없다.

무명에서 깨어나면 어떻게 될까? 일단 죽음에 앞서 생부터 달라질 것이다. ‘무명의 나’가 나밖에 몰라 점점 괴로워지는 ‘실체화된 자아’라면, 그 반대편 풍부하고 광대하게 연결된 삶이 있다. 숨 쉬고, 먹고, 배출하고, 잠자고, 웃고, 떠들고, 사랑하는 등등 내 생활과 활동을 떠올려보자.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들이 있고(단적으로 공기와 햇빛),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사람이나 물건이 있고, 그 사람과 물건 등이 나와 만나기까지 무수한 과정들이 있었다. 돌발성 난청으로 입원한 73세 어머니가 살아온 시간과 관계들, 이제는 60대 인간의 노화를 겪고 있는 고양이가 십여 년 간 인간들과 상호작용하며 살아온 나날들을 상상해본다. 나도, 그들도 서로 연결되어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함께 살아 왔다. 그리고 우리와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무수한 삶들이 있을 것이다. 떠올려보면,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휘감겨 바닷물과 한 몸이 되는 것처럼 아득하다.

살아간다는 행위는 나 이외의 수많은 것들에 의존하기에 가능하다. 이런 상호의존성을 자각한다면, 삶은 ‘나’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몸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수한 생명이 살아가고 죽어간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혹은 내가 죽어도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나간 이 세상은 여전하다. 이 세상을 본다면, 죽음은 단절일 수 없다…! 죽음이 곧 단절이라면 세상은 망가져야 한다. 망가져서 결국 없어져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아무리 슬퍼해도 슬퍼하는 이는 여전히 숨을 쉬고 먹고 마신다. 그 삶과 그 삶이 연결된 세상은 여전하다. 여전히 누군가는 태어나고 누군가는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다른 형태로 함께 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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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행위는 나 이외의 수많은 것들에 의존하기에 가능하다. 이런 상호의존성을 자각한다면, 삶은 ‘나’로서만 사는 게 아니라, ‘몸을 매개로 상호작용하는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무수한 생명이 살아가고 죽어간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혹은 내가 죽어도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나간 이 세상은 여전하다. 이 세상을 본다면, 죽음은 단절일 수 없다…!

 

물론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은 그 순간 분명 충격이다. 내가 알던 그 형상으로 더 이상 연결될 수 없음에 그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한다고 여기면 충격과 슬픔에 갇힐 수 있다. 게다가 내 몸의 일부처럼 아낀 이들이기에, 그 몸에 애착하며 살아온 수많은 시간과 기억이 슬픔을 가중시킬 것이다. 이때 ‘나의 슬픔’에만 빠지는 것은 무명이다. 이 슬픔은 마치 거대한 바다의 일부만 보고 오해하는 것과 같다. 파도치는 바닷물의 어느 한 면을 딱 잘라, ‘내가 좋아하는 파도가 사라졌어’라고 좌절하는 것과 같다. 바닷물 한 바가지 퍼서 모래사장에 버려도 바다는 여전히 바다고, 바가지 속 바다는 모래 속에서 다른 형태가 된다.

우리의 본질은 무명이 아니다. 상호연결성이다. 서로서로가 연결되고 의존되어 세상이 굴러간다는 것, 사랑하는 존재가 익숙한 형상으로 내 옆에 있어도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해도, 이 세상이 곧 우리의 흔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사랑하는 이가 담긴 세상을 잘 살아내야 한다. 가깝게는 그가 사랑한 나의 삶이 슬픔에 빠지는 대신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돌봐야 한다. 삶이 힘들다고 위안되는 무엇에 중독되는 것을 경계하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를 만들고 나 역시 그런 친구가 되어주기. 누군가 나에게 사랑과 관심을 나눠준다면,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에게 받았던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만큼 나 역시 나눠주기. 숨 쉴 수 있는 공기, 기분 좋게 깨어나게 해주는 햇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해주는 어두운 밤을 느끼며 즐거워할 줄 알기. 또 무엇이 있을까. 하나하나 찾아보며 살아가려 한다. 이런 것들은 사랑하는 존재들이 내 옆에 익숙한 형태로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매일매일 오늘 당장이라도 여력만큼 마음 쓸 수 있는 일이다. 마음을 나의 슬픔에 매몰되게 두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확장하기. 죽음을 자각하는 만큼 삶도 세상도 잘 살아가기. 순간순간 생성되고 소멸되는 파도처럼 바다처럼, 삶과 죽음을 함께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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