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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에세이] 죽음을 비춰주는 두 현자의 거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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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7-02 09:32 조회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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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비춰주는 두 현자의 거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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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 수 (금요 감이당 대중지성)

 

죽음의 산업화를 넘어 장자를 통한 도(道)의 완성을 모색하다

아내의 장례식에서 질장구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던 장자. 소크라테스가 이성으로 죽음의 담장을 넘으려 했다면, 장자는 삶과 죽음을 경계 짓는 담장 자체를 허물어버린다. 같이 살면서 자식을 키우고 함께 늙어가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니 심하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장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이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삶의 시작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본디 생명은 없었어. 단지 생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형체도 없었어. 단지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기(氣)조차 없었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저절로 혼합되어 기로 변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되었다가, 지금 다시 변해 죽음으로 돌아간 것이야.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지. 이 사람은 이제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뿐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는다면 운명(命)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그쳤다네.”(『낭송 장자』, 이희경 풀어 읽음, 북드라망, 34~35쪽)

아내의 장례식에서 질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던 그의 파격은 결코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한 존재가 우주적 순환의 리듬 속으로 무사히 귀환했음을 축하하는 거대한 긍정을 노래한 것이다. 장자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기(氣)의 흩어짐이며,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스텝이다. 따라서 장자가 아내의 장례식에서 보여 준 모습은 한 존재가 우주적 순환의 리듬 속으로 무사히 귀환했음을 축하하는 행위였다. 장자는 우주 만물을 氣가 이합집산하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았다.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 氣의 흩어짐이며, 봄이 가고 여름이 오듯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물화(物化)의 과정이었다. 오행의 순환 속에서 화려한 꽃(火)이 지는 것은 열매(金)를 맺기 위한 필연적 물러남이며, 겨울(水)의 휴식은 봄(木)의 탄생을 품은 비움이다. 내가 가진 죽음을 외면하고 싶게 만드는 거부감은 어쩌면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려는 ‘머무름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장자는 삶을 빌려온 것으로, 죽음을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복귀’로 보았다. 그에게 물러남은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도(道)와의 합일이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장자는 無用之用(무용지용, 쓸모 없음의 쓸모)라는 역설을 더 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자본은 정년에 다다른 인간, 병든 인간, 죽어가는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해 왔고, 인간을 산업자원으로서 하나의 소비재처럼 취급해 왔다. 이제는 시대의 변화로 호스피스 산업과 상조 서비스 같은 죽음 산업은 죽음을 하나의 ‘상품’ 혹은 ‘이벤트’로 재편시키기에 이르렀다. 존재의 숙명인 죽음을 둘러싼 자본 흐름의 변화와 산 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 노병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장자는 세상이 말하는 有用(쓸모)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비로소 죽음마저도 하나의 자유로운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無用之用이라는 전복전 포지션에 도달한다. 장자가 말한 산속의 구부러진 나무는 재목으로서의 쓸모없음이 그 나무가 도끼날을 피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했다. 결국 장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전복적 과정을 어떤 도구적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의 본연한 완성으로 격상시킨다.

장자의 리듬을 빌려 나의 공포를 바라본다. 겨울이 오면 몸을 움츠리는 것이 자연스럽듯, 죽음 앞에서 움츠러드는 나의 거부감 또한 생명력이 부리는 자연스러운 조화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이데아’에 도달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어리석음 대신에, 거부하는 마음조차 흐름 속에 있다고 인정하고 위로하면 나는 조금 더 유연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죽음을 외면하려는 나의 어리석음 마저도 도(道)안에서는 계절의 변화처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마땅할지도 모른다고 변명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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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죽음을 외면하고 싶게 만드는 거부감은 어쩌면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려는 '머무름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장자는 삶을 빌려온 것으로, 죽음을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복귀’로 보았다. 그에게 물러남은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도(道)와의 합일이었다.

 

간극의 기록,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는 공부

친구가 항암 치료라는 긴 터널을 지나는 동안, 그를 아끼는 음악 동호회 회원들은 ‘하맘닿 운동’이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기도하는 마음이 하늘에 가 닿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하루에 하나씩 선한 일을 실천하고 공유하는 운동이었다. 누군가의 투병과 죽음의 위기가 역설적으로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친구를 둘러싼 이 다정한 마음들이라니. 죽음이 단지 공포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삶의 가장 숭고한 가치들이 결집하는 순간일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친구는 오래전 장기기증 서약을 했었다. 그러나 종양과 암 진단을 연이어 겪으며 그 서약은 무의미해졌다. 하지만 친구의 그 의지만은 여전히 내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누군가의 죽음이 선의의 기증을 통해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숭고한 기적이 되는 한편, 그 과정은 수술과 면역억제제라는 거대한 의료 시장을 지탱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이제 산업이라는 거대한 그물망 속에서 점점 더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으며, 그 속도와 규모는 개인의 철학적 사유가 따라잡기 힘들 만큼 가속화되고 있다. 숭고한 기증의 뜻이 ‘카데바 거래’와 같은 비정한 자본의 논리로 변질되는 현실은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비정할 수 있는지 일깨운다.

나는 여전히 소크라테스의 논리적 정직함과 장자의 순환적 유연함 사이에서 서성인다. 머리는 죽음을 ‘미지’로 규정하며 두려워하지 말라는 현자의 높은 경지를 우러러보지만, 나의 발바닥은 여전히 차가운 현실의 흙을 딛고 서서 다가올 상실을 거부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자각’은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토 앞에서 오만하지 말라는 서늘한 질책이었다. 그는 무지가 전해주는 공포에 휘둘리기보다, 이성의 눈으로 죽음 너머의 이데아를 직시하라고 권한다. 그러나 죽음이 영혼의 해방이라는 그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내가 득템이와 나누었던 경험과 친구와의 우정을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나의 현실이다. 장자는 삶과 죽음을 낮과 밤의 교차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장자에게 죽음은 개별적 자아의 소멸이 아니라, 우주적 기(氣)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다시 녹아드는 ‘물화(物化)’의 한 장면이다. 질장구를 치며 노래했던 그의 유연함은 집착을 내려놓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무용지용(無用之用)’의 경지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장자가 말한 그 거대한 리듬에 몸을 맡기기엔 이별의 슬픔이 너무나 무겁고, 흐름을 거슬러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은 생존의 욕망이 강렬하다.

그러나 이번 에세이를 쓰며 죽음에 대해 공부하는 의미를 다시금 새겨본다. 글을 쓴다는 것은 머리와 가슴의 간극을 억지로 지우기보다는, 오히려 그 간극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정직하게 기록하는 과정이다. 죽음을 거부하는 본능적인 나와, 죽음을 이해하려는 이성적인 나 사이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는 것. 소크라테스의 준엄한 이성과 장자의 자유로운 리듬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이 서성거림 자체가 바로 삶의 증거이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공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완벽한 해답을 얻어서가 아니라, 해답이 없음을 알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그 ‘불편한 성찰’이 나를 조금씩 깨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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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해답을 얻어서가 아니라, 해답이 없음을 알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그 '불편한 성찰'이 나를 조금씩 깨어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깨달음에 도달하여 성인(聖人)처럼 죽음을 미소로 맞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죽음을 자본의 상품으로만 소비하거나, 혹은 눈 가리고 외면해야 할 공포로만 두지는 않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지팡이 삼았던 ‘무지의 자각’과 장자가 던져준 ‘순환의 리듬’ 사이에서 비록 두렵고 서툴지라도 죽음을 소외시키지 않고 삶의 한복판으로 초대하여 끝내 마주하도록 노력하기! 그것이 내가 나 자신에게 건네는 마지막 위로이자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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