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장례식에서 질장구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던 장자. 소크라테스가 이성으로 죽음의 담장을 넘으려 했다면, 장자는 삶과 죽음을 경계 짓는 담장 자체를 허물어버린다. 같이 살면서 자식을 키우고 함께 늙어가던 아내의 죽음 앞에서 노래를 부르다니 심하지 않냐는 친구의 질문에 장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 사람이 죽었을 때 나라고 어찌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삶의 시작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본디 생명은 없었어. 단지 생명이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형체도 없었어. 단지 형체가 없었을 뿐 아니라 본디 기(氣)조차 없었어.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저절로 혼합되어 기로 변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고, 형체가 변하여 생명이 되었다가, 지금 다시 변해 죽음으로 돌아간 것이야. 이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것이지. 이 사람은 이제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뿐이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이고, 아이고’ 울부짖는다면 운명(命)에 통달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그쳤다네.”(『낭송 장자』, 이희경 풀어 읽음, 북드라망, 34~35쪽)
아내의 장례식에서 질장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던 그의 파격은 결코 슬픔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한 존재가 우주적 순환의 리듬 속으로 무사히 귀환했음을 축하하는 거대한 긍정을 노래한 것이다. 장자에게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기(氣)의 흩어짐이며, 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순환의 스텝이다. 따라서 장자가 아내의 장례식에서 보여 준 모습은 한 존재가 우주적 순환의 리듬 속으로 무사히 귀환했음을 축하하는 행위였다. 장자는 우주 만물을 氣가 이합집산하는 하나의 흐름으로 보았다. 죽음은 생명의 단절이 아니라 氣의 흩어짐이며, 봄이 가고 여름이 오듯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물화(物化)의 과정이었다. 오행의 순환 속에서 화려한 꽃(火)이 지는 것은 열매(金)를 맺기 위한 필연적 물러남이며, 겨울(水)의 휴식은 봄(木)의 탄생을 품은 비움이다. 내가 가진 죽음을 외면하고 싶게 만드는 거부감은 어쩌면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르려는 ‘머무름의 욕망’에서 기인한 것일지 모른다. 장자는 삶을 빌려온 것으로, 죽음을 원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복귀’로 보았다. 그에게 물러남은 존재의 상실이 아니라 도(道)와의 합일이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장자는 無用之用(무용지용, 쓸모 없음의 쓸모)라는 역설을 더 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자본은 정년에 다다른 인간, 병든 인간, 죽어가는 인간을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해 왔고, 인간을 산업자원으로서 하나의 소비재처럼 취급해 왔다. 이제는 시대의 변화로 호스피스 산업과 상조 서비스 같은 죽음 산업은 죽음을 하나의 ‘상품’ 혹은 ‘이벤트’로 재편시키기에 이르렀다. 존재의 숙명인 죽음을 둘러싼 자본 흐름의 변화와 산 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창출, 노병사를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장자는 세상이 말하는 有用(쓸모)의 기준에서 벗어날 때, 인간은 비로소 죽음마저도 하나의 자유로운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無用之用이라는 전복전 포지션에 도달한다. 장자가 말한 산속의 구부러진 나무는 재목으로서의 쓸모없음이 그 나무가 도끼날을 피하고 천수를 누릴 수 있게 했다. 결국 장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죽음이라는 전복적 과정을 어떤 도구적 가치로도 환산할 수 없는 생명의 본연한 완성으로 격상시킨다.
장자의 리듬을 빌려 나의 공포를 바라본다. 겨울이 오면 몸을 움츠리는 것이 자연스럽듯, 죽음 앞에서 움츠러드는 나의 거부감 또한 생명력이 부리는 자연스러운 조화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이데아’에 도달하기보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어리석음 대신에, 거부하는 마음조차 흐름 속에 있다고 인정하고 위로하면 나는 조금 더 유연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죽음을 외면하려는 나의 어리석음 마저도 도(道)안에서는 계절의 변화처럼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마땅할지도 모른다고 변명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