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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덕분에](글창고 순환업로드)인트로 : 과학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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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감이당 작성일26-08-23 10:18 조회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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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 과학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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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영(글공방 나루)

 

# “정말? 진짜 그렇대?” - “응. 과학적으로 그렇대”

과학적으로 그렇대!

무언가 아리송한 문제에 대해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신지. 수긍이 되든, 의심이 들든, 혹은 묘한 반발심이 올라오든, 일단 주춤하게 되는 게 일반적 반응이다. 과학이 말한 것들은 정답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5세기부터 시작된 서구의 과학 혁명은 성서의 권위에 도전했다. 당시 성서는 신의 말씀이자, 신이 창조한 자연의 원리를 담은 책이었다. 해서 자연은 성서를 통해 이해되었고 해석되었다. 혹여 성서와 배치된 이론이 나온다면? 그 잘못은 당연히 이론 쪽에 있었다. 실제로 관찰된 현상이어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로마 가톨릭은 성서를 내세워 그런 연구들을 가차없이 단죄했다. 아마도 이와 얽힌 가장 유명한 일화는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일 것이다. 사실 갈릴레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는 중세 가톨릭이라는 권력에 대항하는 과학의 자유로운 탐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학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맹목적 믿음에 종속된 앎이 아닌, 직접 관찰하고 실험으로 검증하며 자연의 다채로운 모습을 그려내는 앎. 그렇게 뉴턴의 우주가,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빛의 세계, 아인슈타인의 시공간이, 그리고 양자역학의 그 미묘한 층위가 우리의 현실로 들어왔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눈부신 현대 문명은 이러한 과학의 토양이 아니었다면 자라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싸우면서 닮는다고 했던가. 과학은 말 그대로 성서를 ‘대체’했다. 우리는 이제 성서 대신 과학을 ‘믿는다’. 과학이 그렇다면 그런 게 된 거다. 물론 이것이 과학 그 자체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학은 언제나 새로운 이론에 열려 있다. 새로운 관찰과 실험들은 기존의 과학을 뒤흔들고 바꾼다. 그러나 전문 과학자가 아닌 우리에게 과학은? 성서가 그랬듯, 그 어느 담론보다 가장 강력한 힘으로, 권위로 작동한다. 진리의 생산자이자 척도. 과학이 그렇대!

이런 면에서 나와 같은 대중들은 과학이라는 담론의 소비자일 뿐이다. 대중을 위한 다양한 과학 서적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거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설명을 잘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이 하는 이야기 앞에서 우리는 침묵하여 들을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과학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걸까. 그게 진리여서? 하지만 우리를 침묵으로 몰아넣는 것을 과연 진리라 할 수 있을까. 그 침묵 속에서 과학이라는 앎은 오히려 그 다채로운 색채를 잃어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과학이 주는 그 선물같은 앎과 신나게 놀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우리를 침묵하게 하는 과학이 아니라, 우리를 끊임없는 수다로 내모는 과학은 불가능할까.

 

 

#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분리

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서부터 인공위성을 쏘아올리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과학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덕분에 우리네 삶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세탁기를 비롯한 가전제품들은 여성의 가사노동 강도를 현격히 줄여주었고, 인터넷은 정보의 민주화를 견인하면서 대중지성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정작 과학이 생산한 앎 그 자체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문외한이다. 뉴턴의 운동법칙을 몰라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몰라도, 양자역학을 몰라도 KTX를 타고, 네비게이션으로 길을 찾고,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과학과 만나는 현장 대부분은 상품들인 셈이다. 과학은 상품으로 말할 뿐이고, 우리는 그런 상품을 소비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과학의 소비자가 된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과학의 앎과 인간 삶의 윤리가 별개라는 생각이 깔려있다. 과학은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지만, 그건 물리적 세계에만 해당된다는 것. 하여 과학을 기술 발전에는 사용할 수 있지만, 인간 삶에 곧바로 적용할 수는 없다는 것. 요컨대,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분리다.

서구의 근대 과학은 바로 이 분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근대 과학은 신학과의 거리두기가 필요했다. 가톨릭 권력의 도그마를 피해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탐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서 과학은 자기의 영역을 물리적 자연 세계로 한정했다. 자신들은 가톨릭 권력에 도전할 마음이 전혀 없으며, 인간 삶은 가톨릭의 고유한 영역이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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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 종교는 더이상 과학의 탐구를 옥죄지 않는다. 그럼에도 과학이 스스로를 물리적 세계에 가둘 필요가 있을까. 물론 과학이 밝힌 원리를 우리 인간 삶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호랑이의 삶의 방식을 인간 세계로 그대로 가져올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호랑이와 인간은 동물이라는 면에서, 생명이라는 면에서, 그리고 이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 있다는 면에서 함께 나누고 있는 측면이 있다. 물리적 세계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자연과 인간은 같지 않다. 그러나 다르지도 않다. 인간은 물리적 세계를 품고 있고, 물리적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 요컨대, 인간 또한 자연이다. 그러니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한 것이 과학의 앎과 인간의 윤리다.

현대 과학은 우리의 직접적 감각으로는 만날 수 없던 영역을 펼쳐 보인다. 보이는 세계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으며, 둘은 서로 연결되어 이 자연을 이룬다. 우리는 과학을 따라 아주 작은 세계로 들어가고, 아주 큰 세계로 확장된다.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거대한 우주에서 별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을 생성하고, 전자들은 떨어져 있어도 하나로 얽혀 있으며, 빛과 물질은 끊임없이 서로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뿐만이랴. 우주는 그 시작이 곧 끝이고, 진공은 비어있지 않으며, 양자들은 귀신처럼 이곳에서 저곳으로 출몰하고…….

과학은 인간의 단조롭고 거친 감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자연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그곳에서 우리의 일상적 지각은 환상이 되고, 상식으로 이야기되는 논리들은 무너진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평 너머, 기적과 같은 신묘한 변화들이 우리가 사는 지금-여기에 존재함을 알려주는 과학의 탐구들. 이 경이로운 앎을 고작 상품을 소비하는데만 쓴다니 이런 낭비 중에 낭비가 있을까. 과학을 과학 안에 가두어두는 것이야말로 과학을 소외시키는 건 아닐까. 과학이라는 이 멋진 앎을 우리 삶으로 초대하는 방법은 없을까.

 

# 과학,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

1925년,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은 《상대성 이론의 참뜻》을 출간한다. 이 책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완성한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에 관한 철학적 함의가 담겨있다. 러셀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아인슈타인이 깜짝 놀랄 만한 무엇인가를 이룩해 놓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의 수는 대단히 적다. 그가 물리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새로운 생각은 전문어로 싸여 있는 것이다.……필요한 것은 물리 세계에 대한 상상의 변화이다. 즉, 먼 조상 아마도 인류 발생 이전부터 물려받아 왔으며, 우리들 모두가 어릴 적에 배운 심상(心像)의 변화이다. 우리들의 상상을 바꾼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버트런드 러셀, 김영대 역, 《상대성 이론의 참뜻》, 사이언스 북스, 11쪽)

 

물리 세계에 대한 상상의 변화! 이것이, 러셀이 본 아인슈타인 이론의 최고의 성취다. 그렇다. 아인슈타인이 우리에게 준 가장 놀라운 선물은 GPS도, 레이저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곳적부터 가져왔던,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키워왔던 이 세계에 대한 이미지를 혁명적으로 바꿨다는 사실이다.

아인슈타인 이후,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은 완전히 달라졌다. 상상력이 달라졌다니, 뭔가 좀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이란 말 그대로 마음껏, 자유롭게, 생각의 나래를 펼치는 것인데 말이다. 하지만 상상력만큼 구속된 게 없다. 우리는 결코 마음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의 인식은 한 시대 위에서, 한 사회 위에서 자라난다. 그리고 상상력은 그 인식의 경계 안에서 작동한다. 요컨대, 그 시대와 사회의 지평이 상상력의 한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한 시대의 인식의 변화는 상상력의 변환으로 이어지고, 상상력의 전환은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추동한다. 여기에 과학 혁명의 참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학문만의 문제도, 단지 기술력의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과학 혁명, 그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사건이었다.

하여 새로운 과학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 사유에 새로운 상상력을 장착하는 일이다. 뉴턴의 운동법칙에는 뉴턴의 세계관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는 아인슈타인의 세계관이, 양자역학에는 양자역학의 세계관이 깔려있다. 모든 이론과 법칙들에는 그들 각각의 ‘유니버스’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학을 배우며 이런 멀티 유니버스를 탐사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유니버스마다 펼쳐지는 상상력을 접하게 된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갈릴레오와 뉴턴이 중세의 자연학을 넘어설 수 있었던 것도, 아인슈타인이 뉴턴 너머의 자연법칙을 발견한 것도, 그들이 이전과는 다른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해서 물리학자인 김성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과학이 우리에게 입증한 것은 구체적인 이론이나 법칙에 앞서 “단지 사물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지금까지의 관점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라고.

오호라, 바로 여기다. 과학과 삶이 서로 소통하고 넘나드는 통로가 되는 곳. 우리는 과학을 공부하며 상상력을 배운다. 그리고 새롭게 장착한 상상력으로 삶을 새롭게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지나온 경험들을 다른 지평에서 이해하고, 내가 만난 사건들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며, 삶의 길을 다양하게 모색할 수 있는 눈. 바로 이 눈을 우리는 과학 공부로부터 얻을 수 있는 거다. 요컨대,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과학으로부터 배우기!

한번 실험해보자. 털어버리고 싶은 습관을 뉴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바뀌게 될까, 나를 화나게 하는 사건을 상대성 이론의 상상력으로 접근하면 어떻게 될까,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양자역학의 눈으로 길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 등등. 기존의 인식으로는, 내가 가진 사유로는 보이지 않던 층위가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해서 난 과학을 사용하려 한다. 삶에 대한 상상력을 바꾸는 사유의 도구로, 삶의 새로운 윤리를 창안하는 혁명적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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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인식으로는, 내가 가진 사유로는 보이지 않던 층위가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새롭게 드러날 것이다.

 

이 길을 나는 아인슈타인과 시작하려 한다. 러셀이 말했듯, 아인슈타인은 인류의 상상력에 있어서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자신만의 유니버스를 열었다. 물론 그의 유니버스는 갈릴레오와 뉴턴, 그리고 페러데이와 맥스웰이라는 위대한 거인들의 세계 위에서 탄생했다. 해서 그의 우주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갈릴레오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뉴턴의 사과, 그리고 페러데이와 맥스웰의 빛이 낳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하지만 모든 자식이 부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듯, 아인슈타인은 갈릴레오와 뉴턴, 페러데이와 맥스웰과는 완전히 다른 상상력을 보여줄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유니버스, 아니 아인슈타인이라는 유니버스. 그곳에서 우리 삶은 어떤 인식의 지평을 열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바라보고, 사건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게 과학과 삶이 만나면 어떤 유니버스가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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