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실패작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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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극락거사 작성일25-12-06 22:02 조회51회 댓글0건본문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기독교에서는 인간을 신의 피조물이라고 한다. 이 말이 맞다면 신은 국전(대한민국 미술 대전)은 고사하고 초등학교 미술 대회에도 못 나갈 수준의 얼치기 예술가다. 대량 학살범이나 연쇄 살인마는 물론이겠지만,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등 인간이 모인 곳은 어느 곳이든 의견 충돌과 갈등이 끊이질 않는데, 이토록 이기적인 피조물을 만든 신을 어떻게 완벽한 절대자로 숭배할 수 있나? 이쯤 되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인생의 행불행의 절반 이상의 원인이 될 정도로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 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는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전제하는 개념인데, 편의상 두 개의 집단으로 구분해서 분석한다면, 가족, 친구, 연인과 같은 사적이고 친밀한 집단 내에서의 인간관계와 직장이나 군대와 같은 공식적인 집단 내에서의 인간관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중간적 성격을 갖는 집단도 존재할 수 있다.
친밀한 집단 내에서의 인간관계라도 관계의 특수성이나 복잡성을 따져보면 한 부류로 묶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가족처럼 이 집단에서의 인간관계가 인생에서 갖는 의미나 중요성 때문에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지만,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인간관계는 직장 내에서의 인간관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자의 신분이 되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직장에서 근로를 하며 보내야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직장 내에서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물론 편의점 알바나 시장 상인처럼 혼자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점주나 주변 상인들과의 인간관계 등 인간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없다. 경제적 관계는 상호 의존 관계라서 아무도 혼자 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직장 내에서의 공적인 인간관계는 자기 의사에 의해 맺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돈’(화폐)을 벌기 위해 맺어야 하는, 사실상의 반강제적이거나 불가피한 인간관계이다. 젊은 청년들이 징집되어 생전 처음 보는 동년배들과 군대에서 맺는 인간관계가 국가가 강제적으로 맺어주는 한시적인 관계라면, 직장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자본주의가 맺어준 반강제적인 인간관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 맺는 인간관계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고대 사회에서도 존재했겠지만,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라 자본주의가 맺은 인간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어떤 성격을 가질까?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적인 작동을 뒷받침하는 관료제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거대 조직의 일개 부품으로 여기고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업무 환경에서 돈을 벌기 위한 목적 하나를 위해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게 된다. 고상하게 관료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맺는 연결 고리는 돈이다. 인간은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직장 조직은 대개 지위와 권한이 명확하게 규정된 위계적인 관료제 조직이라 자율성과 민주적 소통은 불필요하고 기본적으로 지시와 명령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은 제도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낮지만, 이것은 위계적 관계하에서나 그럴 것이다. 개인적 친소 관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지위, 종교나 정치 등 가치관, 지연과 학연, 성별이나 연령 등 온갖 연고주의를 동원하여 일말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찾아서 어떻게든 편가르기와 구분짓기, 거리두기, 배제와 고립, 제재를 통해 자신들의 편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갈등과 대립, 알력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직장이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노골적이든 잠재적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의 단면일 것이다. 따라서 이해타산과 집단 규범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편, 조직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순응하며 동료들을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인간관계를 처세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장 내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며,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을 갖는다. 좀 더 미시적으로는 윗사람에게는 적당히 아부나 너스레로 심기를 맞출 수 있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자기 의도대로 당근과 채찍으로 밀고 당기며 부리는 권력의 기술을 갖춰야 하며, 적당히 맘에 없는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오버액션’이나 ‘리액션’을 번갈아가며 대화의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집단의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잘 편승하여 인정 욕구를 실현하는 ‘인싸’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조직에서 고립되거나 소외되어 ‘아싸’가 되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이고, 사적인 관계에서나 취하는 관계의 방식, 예를 들어 과도하게 차분하거나, 괜히 진지하거나, 불필요하게 진솔한 성정은 오히려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며, 순진한 사람으로 규정되어 ‘아싸’로 고립될 가능성이 커진다. 어차피 직장 생활은 ‘연기’일 뿐이다.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닌 ‘가짜’의 인간이 ‘가짜’의 인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써야 할 ‘가면’과 공적인 인간관계에서 써야 할 ‘가면’을 구분 못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자가 될 뿐이다. 이게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함께 연기하는 동료 배우들은 퇴사 후에는 모두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필요나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 내의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호혜적인 관계는 같은 편에서나 통용되는 방식이지 괜히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함부로 드러냈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상처만 입을 뿐이다. 이곳에서 적용되는 인간관계는 현실주의, 냉소주의,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이기주의를 원리로 한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자기 편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인간의 평등성을 기초로 한 호혜적 인간관계라기보다는 유무형의 경계가 명확한 종족적, 본능적 동물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집단을 이루며 산다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인생의 행불행의 절반 이상의 원인이 될 정도로 중요할 것이다. 어쩌면 인간 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인간관계는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전제하는 개념인데, 편의상 두 개의 집단으로 구분해서 분석한다면, 가족, 친구, 연인과 같은 사적이고 친밀한 집단 내에서의 인간관계와 직장이나 군대와 같은 공식적인 집단 내에서의 인간관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중간적 성격을 갖는 집단도 존재할 수 있다.
친밀한 집단 내에서의 인간관계라도 관계의 특수성이나 복잡성을 따져보면 한 부류로 묶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가족처럼 이 집단에서의 인간관계가 인생에서 갖는 의미나 중요성 때문에 자주 언급되는 주제이지만,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인간관계는 직장 내에서의 인간관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노동자의 신분이 되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직장에서 근로를 하며 보내야 한다. 일을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직장 내에서 누군가와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물론 편의점 알바나 시장 상인처럼 혼자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점주나 주변 상인들과의 인간관계 등 인간관계를 맺지 않을 수는 없다. 경제적 관계는 상호 의존 관계라서 아무도 혼자 일할 수는 없다. 이러한 직장 내에서의 공적인 인간관계는 자기 의사에 의해 맺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돈’(화폐)을 벌기 위해 맺어야 하는, 사실상의 반강제적이거나 불가피한 인간관계이다. 젊은 청년들이 징집되어 생전 처음 보는 동년배들과 군대에서 맺는 인간관계가 국가가 강제적으로 맺어주는 한시적인 관계라면, 직장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자본주의가 맺어준 반강제적인 인간관계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 맺는 인간관계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고대 사회에서도 존재했겠지만,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라 자본주의가 맺은 인간관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 맺는 인간관계는 어떤 성격을 가질까? 자본주의 체제의 효율적인 작동을 뒷받침하는 관료제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거대 조직의 일개 부품으로 여기고 타율적이고 수동적인 업무 환경에서 돈을 벌기 위한 목적 하나를 위해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인간관계를 맺으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게 된다. 고상하게 관료제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맺는 연결 고리는 돈이다. 인간은 돈이라는 목적을 위해 서로 만나는 것이다.
직장 조직은 대개 지위와 권한이 명확하게 규정된 위계적인 관료제 조직이라 자율성과 민주적 소통은 불필요하고 기본적으로 지시와 명령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의견 충돌은 제도적으로 발생할 가능성이 낮지만, 이것은 위계적 관계하에서나 그럴 것이다. 개인적 친소 관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지위, 종교나 정치 등 가치관, 지연과 학연, 성별이나 연령 등 온갖 연고주의를 동원하여 일말의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찾아서 어떻게든 편가르기와 구분짓기, 거리두기, 배제와 고립, 제재를 통해 자신들의 편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갈등과 대립, 알력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직장이다. 이러한 대립과 갈등은 노골적이든 잠재적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직장 내 인간관계의 단면일 것이다. 따라서 이해타산과 집단 규범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한편, 조직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순응하며 동료들을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며 인간관계를 처세의 영역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장 내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며, 수단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을 갖는다. 좀 더 미시적으로는 윗사람에게는 적당히 아부나 너스레로 심기를 맞출 수 있어야 하고, 아랫사람은 자기 의도대로 당근과 채찍으로 밀고 당기며 부리는 권력의 기술을 갖춰야 하며, 적당히 맘에 없는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오버액션’이나 ‘리액션’을 번갈아가며 대화의 기술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집단의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잘 편승하여 인정 욕구를 실현하는 ‘인싸’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조직에서 고립되거나 소외되어 ‘아싸’가 되는 것은 곧 사회적 죽음이고, 사적인 관계에서나 취하는 관계의 방식, 예를 들어 과도하게 차분하거나, 괜히 진지하거나, 불필요하게 진솔한 성정은 오히려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업무 효율을 떨어뜨리며, 순진한 사람으로 규정되어 ‘아싸’로 고립될 가능성이 커진다. 어차피 직장 생활은 ‘연기’일 뿐이다. 자신의 본 모습이 아닌 ‘가짜’의 인간이 ‘가짜’의 인간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적인 인간관계에서 써야 할 ‘가면’과 공적인 인간관계에서 써야 할 ‘가면’을 구분 못하고 자기 역할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는 사람은 낙오자가 될 뿐이다. 이게 사회생활이고 인간관계인 것이다.
그리고 직장에서 함께 연기하는 동료 배우들은 퇴사 후에는 모두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더 이상 필요나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직장 내의 인간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호혜적인 관계는 같은 편에서나 통용되는 방식이지 괜히 진솔한 감정과 정서를 함부로 드러냈다가는 이용만 당하고 상처만 입을 뿐이다. 이곳에서 적용되는 인간관계는 현실주의, 냉소주의,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이기주의를 원리로 한다고 봐야 한다. 적어도 자기 편이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렇다. 인간의 평등성을 기초로 한 호혜적 인간관계라기보다는 유무형의 경계가 명확한 종족적, 본능적 동물 관계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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